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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독립운동의 아버지,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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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독립운동의 아버지,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철

단군신앙 계승 대종교 독립투쟁 앞장
청산리대첩 이끈 ‘북로군정서군’ 육성
초대 교주 나철, ‘을사오적’ 처단 결사
임정활동 핵심단체로 항일 투쟁 전개
1916년 구월산에서 유서 남기고 순명

게재 2021-08-11 17:01:06
홍암 나철 기념관(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115번지)
홍암 나철 기념관(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115번지)
만주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3종사 무덤 (가운데가 나철선생 무덤)
만주 화룡시에 있는 대종교 3종사 무덤 (가운데가 나철선생 무덤)
대일 외교항쟁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4명의 동지(왼쪽부터 이기, 나철, 홍필주, 오기호)
대일 외교항쟁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4명의 동지(왼쪽부터 이기, 나철, 홍필주, 오기호)
홍암사 사당에 모셔진 영정과 위패
홍암사 사당에 모셔진 영정과 위패
순명 직전 황해도 사리원역 앞에서 제자들과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가 나철.
순명 직전 황해도 사리원역 앞에서 제자들과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가 나철.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핵심 단체였다

대종교에 대해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대종교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단군 신앙을 근대 신앙으로 발전시킨 종교로서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였으며, 1910년대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종교에 가담하여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대종교가 일제 강점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대종교인들의 활동은 교과서 서술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1919년 상하이에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이동녕·이시영·신규식이 내무·재무·법무총장으로 참여하였다. 이뿐만 아니다. 임시의정원 29명 중 21명, 종두법의 지석영, 한글학자인 주시경·최현배,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신채호·박은식, 독립군 지도자 서일·김좌진·이동휘·김동삼·이범석,『임꺽정』의 저자인 홍명희,「아리랑」을 제작한 배우 나운규 등도 모두 대종교인이다. 특히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군'은 대종교에서 육성한 독립군이었다.

대종교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포교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4년 5월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이전하였다. 그리고 대종교 총본사 산하에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4개 교구를 설치하였다. 헤이그 특사 이상설이 북도본사를, 동제사를 조직한 신규식과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이동녕이 서도본사를, 청산리 대첩 이후 조직된 독립군 연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이 동도본사의 책임자였다. 당시 대종교의 위상이 짐작된다.

대종교는 단군을 숭배하는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었다. 한글과 역사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임시정부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만주에서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의 핵심 단체였다. 일제가 다른 종교와 달리 대종교를 탄압한 이유였다.

을사오적 암살단, 자신회를 결성하다

대종교의 초대 교주가 된 나철(羅喆, 1863~1916), 본명은 두영이었다. 이후 인영으로 이름을 바꾼 뒤 대종교 중광 후 다시 철로 바꾸었다. 본관은 나주, 호는 홍암(弘巖)이다.

1863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부친 나용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무렵 매천 황현이 스승으로 모신 구례의 왕석보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세이던 1891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가주서, 승문원권지부정자 등을 역임하였고, 1895년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1905년 6월, 나철은 국제여론을 파악하고 외교항쟁을 벌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국권을 지켜내고자 했으나, 일본 공사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이기·오기호·홍필주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대일 외교항쟁을 전개하였다. 나철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본 총리대신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등에게 "한국의 주권을 보장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중·일 3국이 친선동맹을 맺고 선린우의로서 독립을 보장하라"라는 의견서를 전달하였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체결 이후 4차례에 걸친 대일 외교항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나철은 학부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동양 평화를 헤치고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은 '을사오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비밀결사를 결성한다. 1907년 결성된 자신회(自新會)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해 3월 25일 30여 단원과 함께 의거를 결행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나철은 10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무안군 지도에 유배된다.

단군교 중광한 뒤 대종교로 바꾸다

5개월만에 고종의 특사로 풀려난 후 나철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나라의 시조인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한다. 이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重光節)'이라고 부른다. 중광이란 우리 민족이 믿었던 옛 종교를 되살린다는 뜻이다.

그러자 이미 살핀 것처럼 수많은 지식인과 우국지사들이 단군교에 몰려들었다. 당황한 일제는 국권 침탈 뒤 제일 먼저 단군 관련 책자 20여 만권을 압수해 불태우는 등 엄청한 탄압을 가하였다. 나철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개칭한다.

경술국치 이후 국내에서의 포교 활동이 금지되자, 1914년 교단 본부를 백두산 북쪽의 화룡시 청파호 부근으로 이전하였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4대 교구를 설치하여 만주를 주 무대로 교세 확장에 주력, 30만 신도를 확보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무속을 비롯한 국내의 모든 종교 단체는 재 인허가하면서, 대종교만은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여 서울의 남도 본사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교단이 위기에 처하자, 나철은 1916년 8월 15일 단군 사당인 황해도 구월산 삼성단에서 유서를 통해 김교헌(1868~1923)을 2대 교주로 지명하고 순명했다.

그는 순명 직전에 다섯 아들에게 다음의 유언장을 남긴다. "초상에는 울음을 울지 말며, 염함에 명주 비단을 쓰지 말고 삼베 무명으로 하라. 장사에는 꽃상여 등 옛 제도를 쓰지 말며, 명정에는 다만 성명 두 글자만 쓰고 화장하여 깨끗함을 얻게 하고……제사의 기일에는 고기와 술을 쓰지 말며 다만 한 그릇 밥과 한 가지 반찬으로 하고, 신주를 만들지 말며 소리내어 울지 마라." 유언은 나철이 어떤 분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가 순명하자 후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역사학자 박은식은 추도사에서 그를 "민족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란 뜻으로 "만세의 종사(宗師)"라고 했다. 종사는 대종교에서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자를 말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 존경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현장을 찾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대종교 대종사 나철,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그가 태어난 보성 금곡마을을 찾아가야 한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115번지, 이곳이 홍암 나철이 태어난 생가터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고 2005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지만, 그를 기리는 사업은 한동안 변변치 못했다. 2008년 생가가 복원되고, 2009년 그를 기리는 세 칸 한옥의 사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교과서에 실린 그의 영정은 마을 입구 컨테이너박스 안에 처박혀 있었다. 2016년에서야 멋진 팔작지붕의 외관을 갖춘 한옥풍의 기념관이 '홍암 나철 기념관'이란 이름을 달고 문을 연다.

2단으로 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홍암관'이, 왼쪽에는 '독립운동관'이, 그리고 정면에는 그의 신위와 영정을 모신 사당 '홍암사'가 있다.

나철의 일생을 보여주는 곳은 홍암관이다. 홍암관에는 나철의 출생과 성장, 대일외교항쟁, 을사오적 처단 의거 등 독립운동 관련 활동들과 대종교의 중광과 발전 그리고 순명에 이르까지의 자료들이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자료 중 두 개의 사진이 필자의 발을 오랫동안 붙잡았다. 하나는 1905년 대일 외교항쟁을 벌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이기·홍필주·오기호 등 세명의 동지와 함께 양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의 주인공들은 대일 외교활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1907년 자신회를 결성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주도한 인물이 된다.

또 한 장의 사진은 1916년 8월 5일, 구월산 삼성사를 참배하기 직전 사리원역 사진관에서 김두봉 등 6명의 제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고, 10일 뒤인 8월 15일 삼성사에서 순명했으니, 나철의 마지막 사진인 셈이다. 사진 속 나철 왼쪽의 인물이 김두봉이다. 그는 나철이 순명하자, 시신을 대종교 총본산이 있는 백두산 자락의 청파호에 안치한 분인데, 유명한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였다. 그는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다 1942년 옌안으로 들어가 좌파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독립동맹의 주석된 인물이다.

사당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2단의 계단을 또 올라가야 한다. 개천문을 지나면 5칸짜리 거대한 사당이 나온다. 홍암 나철 선생과 두 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홍암사'다. 사당 안 정면에는 나철 영정과 '홍암 나철 선생 신위'라고 한글로 쓰인 위패가 있고, 왼쪽 벽면에는 두 아들 정련과 정문 두 분의 위패가 있다. 두 아들도 부친을 이어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일경에 체포된 후 옥중에서 순국한 분들이었다. 사당 오른쪽 벽에는 벽면을 가득 메운 대형 태극기가 걸려있다. 필자가 본 가장 큰 태극기였다.

그의 무덤은 백두산이 바라보이는 만주의 화룡시 청파호 부근에 있다.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단에서 순국하자, 비서 김두봉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대종교 총본사였던 이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은 2대 교주 김교헌과 '대한독립군단'을 이끈 서일과 함께 있다. 각각의 무덤 앞에는 1미터 정도의 묘비와 상석이 놓여 있고, 묘의 우측에 '반일 지사 무덤'이라 쓰인 조그마한 돌 비석이 서 있다. 묘역은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봉분은 작고 초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