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추사·다산·초의선사 인사들의 총화 '일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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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추사·다산·초의선사 인사들의 총화 '일지함'
■초의와 차선고도 ||남도의 물길 따라 교우했을 ||옛 연인의 터에 앉아||그윽한 차향 맡는 것||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분한 소확행일지 모르겠다
  • 입력 : 2022. 03.10(목) 16:45
  • 편집에디터

무안 삼향 초의기념관에 복원된 일지암. 이윤선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초의선사가 일지암을 짓고 지은 시라 한다. 일지암을 아는 사람들은 이 시가 형용하고 있는 풍경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짙은 운무 출몰하는 비경과 초암에 앉아 차 한잔하는 즐거움이 보이지 않는가. 대흥사 일지암이 지금은 운용의 묘를 살린 탓인지 여러 채의 절간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초암 곧 일지암에 있다.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각양의 인사들과의 교류가 낳은 총화라고나 할까. 여기에 초기 카톨릭의 숨겨진 영향까지 거론한다면 불선(佛禪)을 넘어선 유불선기(儒佛仙基)를 거론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초의는 본래 무안(당시에는 나주에 속함) 삼향 사람이다. 지금은 삼향에 초의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용운스님의 노력으로 일지암도 재현해두었다.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이곳에 터를 잡고 주경야독하는 중이다. 나는 곧 출판되는 졸저에서, 무안만(남도만과 무안만에 대해서는 본 칼럼에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의 차와 이를 재구성할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상정하고 '고양의 길'이라는 표제를 붙여 두었다. 불교 중심으로 차 문화가 확장되었고, 스님들 중심으로 차 생활이 보편화 된 것도 어찌 보면 스스로를 고양하는 첨단의 콘텐츠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간에 차와 명상, 힐링, 수련, 영성 등의 조합을 이룬 다종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추사가 남긴 명선(茗禪)이라는 글씨가 그 행간에 있다.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호이기도 하다. 대개 이를 '차를 마시며 선정(禪定)에 든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 명(茗)은 차의 싹을 말하는 것이니 차를 마시며 선을 행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구체적인 차선고도의 루트나 프로그램을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차가 명상이나 요가, 이른바 마음수련에 있어 최고의 콘텐츠라는 생각은 부기해 둔다.

정민 교수의 작업에 기대어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상상하다

중국에서 한해륙에 이르는 이른바 뱃길을 전제해본다. 초의에 앞선 차문화 정리의 맥락이기도 할 것이다. 정민이 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글항아리, 2018)는 차선고도를 설정하는 데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지면상 몇 가지만 인용해 공부자료로 삼는다.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해금 정책이 풀리자 중국의 서남해안에서 북상하는 뱃길이 열렸다. 배를 통한 물류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서남 연안에 중국 상선의 표착이 부쩍 늘어났다. 특별히 1760년 서해안에 표착한 중국 배에는 황차(黃茶)가 가득 실려있었다."

또 이덕리의 '기다' 중 '다설' 제3조에 남은 기록을 보고하고 있다. "경진년(1760, 영조36)에 차 파는 상선이 와서 온 나라가 그제야 차의 생김새를 처음으로 알았다. 이후 10년간 실컷 먹고 떨어진 것이 하마 오래되었는데도 또한 채취해서 쓸 줄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 됨이 분명하다. 비록 물건을 죄다 취한다 해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

정민은 이외에도 박제가의 '북학의'를 인용하며 1760년에 왔다는 표류선의 존재를 보고하고 있다. 황차와 관련된 내용이다. 지면상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관심 있는 분들은, 1762년 11월 7일자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표류선 기사를 참고해도 좋다. 정민은 사흘 뒤인 11월 12일자 '승정원일기'를 인용하며 중국 표류인들이 가져온 황차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표류선 관련 기록에서 황차가 등장하는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고군산진에 표착한 절강 상인의 배에 황차엽이 대량으로 실려있었고 당시 금주령 상태에 있던 조선에서 이 황차는 제사 때 쓰는 제주(祭酒) 대신으로 각광을 받아 수요가 갑작스럽게 급증하게 되었던 사정이 짐작된다."

이 시기 중국 남쪽 배들의 서남해안 표착이 상당히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금주령 하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황차가 특수를 누리면서 비로소 차의 존재가 조선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초의의 차를 가까이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초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덕리를 공부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민의 연구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다. 초의 이전의 이덕리에 대한 정보는 정민이 거의 유일하고도 상세하게 연구해놓았기 때문이다.

무안군 삼향읍 왕산마을 초의생가. 이윤선

남도인문학팁

차마고도에서 차선고도까지

주지하듯이 차마고도(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 Southern Silk Road)는 비단길보다 먼저 생긴 무역로이다. 중국의 윈난성, 쓰촨성에서 시작된다. 티베트, 인도, 파키스탄 등지를 거쳐 실크로드로 이어진다.위키사전의 설명을 빌리면, 마방(馬幇)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말과 야크를 이용해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서로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닌 길이다.

차와 말만 사고팔았겠는가. 당연히 이곳을 통해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에는 유럽까지 연결되기도 했다. 해발고도 4000미터가 넘는 험준하고 가파른 길이지만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길로도 유명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2007년 KBS에서 6편으로 구성한 차마고도에 관한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차마고도>부터이다.

나도 여러 차례 윈난지역을 방문하여 관련 정보들을 갈무리한 적이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무역로라고 추정하는 길이기도 하다. 차선고도(茶船古道)는 이에 착안한 것이다. 광의의 차선고도는 멀리 중국으로부터 뱃길을 통해 우리와 연결된 항로 혹은 차도(茶道)를 말하는 것이고, 협의의 차선고도는 초의선사의 생가인 현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혹은 신기마을에서 출발하여, 어린 나이에 출가한 나주의 운흥사로, 다시 평생을 보낸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까지 이어지는 길, 나아가 강진, 보성, 하동 등을 연결해본 것이다.

지금은 뱃길이 막혀있지만, 물골이 있던 때를 상상하여 이 루트를 재구성한다면 틀림없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초의선사 생가 아래 오두막 하나 짓고 살면서 차에 대해 상고해나가는 중이다. 아마 초의선사가 고금의 중매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지만 차는 분청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찍이 일본인들이 국보급 예우를 했던 분청사기는 사실 남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생활 용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이들이 분청이 가진 미학에 주목하였고 끝내 일본 최고의 다기로 대접하기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차나무에 귀를 대고 들으니 곧 새싹이 올라올 듯하다. 아, 봄이로구나. 올해는 보다 어린잎을 따서 황차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남도의 물길 따라 교우했을 옛 인연의 터에 앉아 그윽한 차향 맡는 것, 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분한 소확행인지도 모르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선이 끝났다. 승자에게는 축하의 차 한 잔, 패자에게는 위로의 차 한 잔 건넨다. 승자는 승자대로 패자는 패자대로 역할이 있을 것이다. 혐오와 배제는 저만치 던져버리고 오직 나라의 융성을 도모하는 데 힘을 합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 생각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