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이순신이 명랑대첩 구상했던 '옛 진도의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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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이순신이 명랑대첩 구상했던 '옛 진도의 관문'
■진도 벽파마을 ||산과 섬이 바람과 파도 막아주고 ||수심 깊은 '천혜의 항구' 벽파항 ||벽파항 언덕 위 충무공 전첩비 ||국민과 한문 섞어 쓴 최초 비석 ||진도대교 개통 후 한적한 마을로 ||주민 대부분 쌀·대파·배추 농사
  • 입력 : 2022. 03.24(목) 14:43
  • 편집에디터

벽파마을 전경. 벽파방조제에서 바라 본 풍경이다. 이돈삼

진도대교를 넘어 해안도로를 따라 벽파마을로 간다. 지난 주말이었다. 울돌목에서의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이 벽파진에 머물던 그때처럼 비가 뿌리고, 된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들 지경이다.

이순신은 1597년 8월 29일, 양력으로 10월 9일 벽파진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이순신은 울돌목으로 수군진을 옮기기 전까지, 여기에 머물며 명량에서의 전투를 그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

벽파마을 전경. 벽파방조제에서 바라 본 풍경이다. 이돈삼

이순신은 명량대첩을 하루 앞둔 9월 15일(양력 10월 25일) 조수를 타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긴다. 울돌목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은 수의 군사와 배로 많은 수의 일본군과 일본의 전선에 맞서려면 울돌목의 좁은 해로가 제격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일부당경 족구천부, 一夫當經 足懼千夫)'는 이순신의 말은 울돌목을 염두에 둔 지략이었다.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큰 승리였다.

벽파항 언덕에 이충무공 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일본군과 일촉즉발의 시간을 보냈던 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바다 저 너머에는 일본이 자리하고 있다. 전첩비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진도군민과 교직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벽파마을 전경. 벽파진에서 본 모습이다. 이돈삼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고작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가운데 부분 생략)… 공은 다시 생각한 바 있어 십오 일에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열두 척 적은 배로서 삼백삼십 척의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길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뒷부분 생략)…'

벽파정. 이충무공 전첩비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이돈삼

이충무공 전첩비.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일본군과 일촉즉발의 시간을 보냈던 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돈삼

노산 이은상이 글을 쓰고, 소전 손재형이 글씨를 쓴 전첩비의 일부분이다. 국문과 한문을 섞어 쓴 우리나라 최초의 비석이다. 비면에 새겨진 888글자(한자 272자, 한글 616자) 모두 다른 글씨체로 쓰여진 것도 색다르다. 36번 들어간 '이'자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똑같은 글씨체가 하나도 없다. 단순한 글씨가 아닌, 글씨작품을 써야 한다는 소전의 평소 생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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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은 진도의 동북쪽 끝자락에 있는 포구다.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속한다. 해남 어란진에서 울돌목으로 가는 길목이다. 1207년(고려 희종 3년) 벽파진을 진도와 해남을 연결하는 나루터로 개설하면서 정(亭)과 숙소인 원(院)을 설치했다.

고려시대 삼별초 군사들도 이곳을 통해 진도로 들어왔다. 삼별초군은 고려가 몽고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 환도를 강행하자 이에 불복하고 대몽항쟁을 결의했다.

벽파항에서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삼별초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이다. 강화도에서 내려온 삼별초군은 자주와 평등을 기치로 내걸고,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을 산성을 쌓았다. 성의 둘레가 13㎞에 이른다.

벽파마을 전경. 이충무공 전첩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이돈삼

벽파정. 이충무공 전첩비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그 너머로 감부도가 보인다. 이돈삼

하지만 삼별초군은 진도로 내려온 지 9개월 만에 여몽연합군에 의해 무너졌다. 용장산성 안에 석축이 웅장한 계단 모양의 행궁 터가 남아 있다.

삼별초군의 패전은 진도사람들에게 유랑과 고통의 시작이었다. 몽골군은 진도사람들을 삼별초군의 부역자로 몰아 포로와 노예로 잡아갔다. 조정의 공도(空島)정책에 따라 섬도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진도사람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정서와 문화를 만들어냈다. 진도를 '남도문화의 보물창고'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충무공 전첩비로 가는 길.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다. 이돈삼

벽파진은 삼국시대에 일본에서부터 우리나라 남해와 서해를 거쳐 중국까지 이어지는 고대 해로의 일부였다. 여기에 설치된 정(亭)이 벽파정이다. 벽파진의 어귀에 있었다.

벽파정은 진도를 오가는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신, 승진이나 좌천으로 오가는 군수, 유배자 등이 오가는 진도의 관문이었다. 지금도 그 터가 벽파항에 남아 있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머물면서 명량대첩을 구체적으로 구상한 곳이기도 하다.

벽파진은 근현대까지도 진도의 관문 역할을 했다. 진도사람들은 여기에서 해남을 오가며 뭍과 끊임없이 소통했다. 뭍과 이어주는 철부선이 오가고, 제주도로 오가는 배가 드나든 벽파진은 진도에서 가장 큰 나루터였다. 1984년 진도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그랬다.

벽파정(碧波亭)이 있었다고, 마을 이름이 벽파리다. 항구는 벽파진, 벽파항이 됐다. 한때 '벽동(碧洞)'으로도 불렸다. 마을은 1500년 경에 이뤄졌다. 입향조는 이천서씨다. 진도군 고일면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고군면으로 편입됐다.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야산이 서쪽을 에워싸면서 포구를 보호하고 있다. 감부도, 석도 등 크고 작은 섬이 파도도 막아준다. 반면 수심은 깊어 천혜의 항구가 됐다.

진도의 관문이 진도대교로 옮겨지면서 벽파진은 한적한 마을이 됐다. 포구도 한산해졌다. 마을에는 100명 안 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삶의 터전은 벽파방조제로 생긴 간척지다. 주민들은 논밭에서 쌀과 대파, 봄배추 농사를 짓는다. 바다에서는 폐염전을 활용한 새우양식을 일부 주민이 할 뿐이다.

하지만 벽파항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자긍심은 높다.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진도의 관문이었고, 고려의 최후 보루였고, 조선을 지킨 파수꾼이었다는 사실을 늘 간직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벽파정의 옛 터. 벽파항 바로 앞에 있다. 이돈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