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신간회 이후 최대 규모 항일 조직, 전남운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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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신간회 이후 최대 규모 항일 조직, 전남운동협의회
1933년 5월 해남에서 ‘전남운동협의회’ 결성||노동자·농민 중심의 당 건설 농민운동 전개||53개 지역에 농민반 조직, 야학 28개소 설치||김홍배·오문현·황동윤·이기홍 중심 본격 활동||1934년 병영주재소 방화사건 수사 조직 노출 ||558명 검거, 57명 기소, 49명 재판에 넘겨져||26명만 유공자로 서훈 역사적 평가마저 야박
  • 입력 : 2022. 06.29(수) 15:18
  • 최도철 기자

전남운동협의회 핵심 인물(매일신보, 1934년 9월 10일자)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관련 500여 명 검거를 보도한 동아일보(1934년 6월 13일자)

전남운동협의회 서기 김홍배의 집터(해남군 북평면 이진마을)

전남운동협의회 결성지, 성도암(해남군 북평면)

동아일보, 연일 대서특필

1933년 5월 14일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라는 농민조직이 결성된다. 하지만 전남운동협의회는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해체된다. 1934년,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으로 강진의 윤가현이 체포되면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1934년 2월, 전남경찰부 고등과 특별고등계 주임 노주봉의 지휘로 각 군의 경찰서가 모두 동원되어 해남·완도·장흥·강진·영암 등으로 수사가 확대된다. 그 결과 해남을 비롯한 9개 군에서 6개월 동안 558명이 검거되고, 57명이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49명이 재판을 받는다. 당시 조선일보는 호외를 뿌렸고, 동아일보는 연일 '공산주의 대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 등의 제목을 달고 대서특필한다. 이 사건을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이라 부른다.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남운동협의회가 결성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1925년 창립된 조선공산당은 무려 4차례나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지도부가 와해된다. 이에 지도부 재건을 놓고 인텔리 중심의 지도부를 노동자, 농민 속에 뿌리를 둔 활동가로 바꾸자는 새로운 방침이 제기되고 많은 젊은 운동가들이 공장과 농촌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제시된 대안이 노동자·농민 중심의 당 건설이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투사들이 농민과 노동자가 있는 농촌으로, 공장으로 들어간 이유다.

그 결과 1930년대 초반 해남·완도·강진 등에서 '농민 조직화 및 대중 투쟁의 전개'라는 목표 아래 독립운동가들은 농민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묶는 상부 조직으로 전남운동협의회가 조직된 것이다. 전남운동협의회는 농촌 마을을 조직의 기본 토대로 삼고 농민반, 청년반, 소년반을 결성하고 면과 군 단위 조직을 건설하였으며 전체 조직을 지도하는 상부 조직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다. 해남과 완도에서 출발했지만, 최종 목표는 전국적인 항일조직체의 결성이었다.

전남운동협의회 결성지,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

전남운동협의회의 핵심 인물은 해남 출신의 김홍배와 오문현, 완도 출신의 황동윤과 이기홍 등이었다. 김홍배와 황동윤 등은 1933년 1월 10일과 28일,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梨津里) 최상준의 집에서 두차례 모임을 갖고 두 군의 농민운동을 지도하고 통제할 기구 설치 등에 관한 협의를 한다.

그리고 김홍배, 황동윤, 오문현 등 3인이 1933년 5월 14일,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 성도암(成道庵)에서 전남운동협의회를 조직하고, 협의회 밑에 사무부, 조사부, 선전 및 구원부를 둔다. 오문현이 의장에, 김홍배가 서기에 선출된다. 황동윤이 조사부를, 김홍배가 사무부를, 오문현이 조직부를 맡았고, 당일 참석하지 않은 이기홍은 선전 및 구원부를 맡는다. 기관지로는 『농민투쟁』을 발간하였다.

1933년 8월 11일, 황동윤·김홍배·오문현·이기홍은 해남 대흥사의 심적암(深寂庵) 부근에서 모임을 갖고 운동 대상을 농민으로 한정하였다. 그리고 지도기관으로 해남·완도 등 각 군에 걸쳐 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고, 마을별로 2~5명 단위의 농민반, 청년반, 소년반 결성을 결의한다. 농촌 현실에 맞게 노동자를 제외한 것이다. 전남운동협의회라는 지도부 명칭도 '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로 개칭한다.

이후 전남운동협의회는 강진·영암·장흥으로 확대된다. 전남 5개군 53개 지역에 농민반이 조직되었고, 농민야학·노동야학 등 28개소가 설치되어 문맹 퇴치와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각 군의 지회 단위로 소작쟁의 활동을 지원하고 농민들의 비참한 실태, 자본가와 지주의 횡포 및 착취 행위를 풍자하는 소인극(素人劇, 아마추어 연극)을 공연하였다. 소인극을 통해 지주와 소작인 관계의 계급적 모순을 인식시켰던 것이다. 전남운동협의회의 핵심 인물인 이기홍이 고향인 완도군 고금면 청룡리에서 70~80여명이 모인 가운데 공연한 '어느 농민'의 소인극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악랄하고 응큼한 지주가 가난한 소작인의 딸을 탐내고 빚을 독촉하는가 하면 소작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한다. 견디다 못한 소작농의 딸은 지주와 혼례를 치른다. 바로 그 순간 소작인의 딸을 사랑하던 동지적 입장의 소작인 아들이 감쪽같이 딸을 납치하여, 둘은 행복해진다."

우연한 사건으로 발각

1927년 신간회 결성 이후 최대 조직이었던 전남운동협의회가 발각된 것은 의외의 사건 때문이었다.

1933년 12월 어느 날 강진군 군동면의 유명 술집에 청년 12명이 모였다. 망년회였다. 같은 시간 옆 방에서는 강진의 유지들과 강진경찰서 고등계 형사 윤금죽 등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유지들과 함께 있던 아가씨가 자꾸만 청년들의 방을 드나들자, 화가 난 윤금죽이 아가씨의 손에 수갑을 채우려 했다. 이를 본 청년들이 달려들어 싸움이 일어났고, 청년들에게 맞은 윤금죽이 비밀조직이 있은 것 같다고 전남경찰부에 보고한다.

당시 강진경찰서는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의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전남경찰부는 전남지역에서 전남노농협의회라는 조직이 적발되어 117명이 검거된 상태여서 긴장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전남경찰부가 강진에 내려와 청년들의 집을 압수 수색하였는데, 그 중 다섯 명의 집에서 마르크스 레닌 관련 서적이 발견되었고, 그 책의 주인이 윤가현임이 밝혀진다. 1934년 1월 22일 전남운동협의회 강진 지역 책임자였던 윤가현이 체포되고, 연이어 배후 인물로 이기홍이 체포된다.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직의 냄새를 맡은 일제는 2월 27일 전남경찰부 고등과 특별고등계 주임 노주봉의 지휘하에 지역 경찰서와 연계하여 대대적인 조직원 검거에 들어간다. 검거 기간만 무려 6개월, 558명이 검거되고 57명이 기소된 후 49명이 재판을 받게 된다.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은 전남운동협의회의 핵심 간부였던 황동윤과 김홍배에게는 3년을, 오문현과 이기홍에게는 2.6년형을 선고한다. 재판을 받았던 49명은 대부분 완도·해남·강진·장흥·영암군 등 5개군 출신이었다.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참여한 후 졸업했거나 퇴학당한 분들도 5명이나 되었다. 완도 출신의 이기홍과 영암 출신의 최규문은 광주고보 퇴학생이었으며, 성진회 핵심 멤버로 장흥 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왕재일은 광주고보 졸업생이었다. 완도 출신의 문승수는 광주농업학교 졸업생이었고, 완도 출신의 황상남은 전남사범학교 독서회 회원이었다.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주역으로 활동하다 퇴학당한 다수가 고향에 내려가 사회주의 계열의 농민운동에 헌신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직업이 경찰인 분도 있었다.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 출신의 오홍탁이 그다. 당시 그는 강진경찰서에 근무하던 순사였다. 해남공립농업실습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를 공부하였고, 경찰이 된 이후에도 동지들에게 각종 정보를 전해주었으며, 전남운동협의회 산이면 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현직 경찰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어서 당시 동아일보(1934년 9월 10일자)에 '주모자 김홍배와 순사 오홍탁의 활동'이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하기 위한 예비모임 장소가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최상준의 집이다. 이진리는 협의회 주역인 김홍배가 태어난 고향일 뿐 아니라 농민운동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김아기·김암우·문둔동의 고향이며 고금면 우두리 출신인 차태희의 활동지이기도 했다. 즉 해남 이진 마을은 전남운동협의회의 못자리, 태동지인 셈이다. 그러나 오늘 전남운동협의회의 태동지임을 알려주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이들 청년 항일운동가들을 길러냈던 사립 동광학원의 흔적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이진 마을 가까이의 북평면 동해리 성도암은 전남운동협의회 결성 장소다. 오늘 성도암이 있었던 곳은 저수지로 변해 버렸고, 어떤 표지판도 없다. 핵심 간부들이 만났던 대흥사 안의 심적암이나 해남 미황사 부근도 마찬가지다. 49명 중 26명만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을 뿐, 역사적 평가마저도 야박하다(2021년 현재).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