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중흥조 주희 모신 朱子廟… 중국인들 큰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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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
성리학 중흥조 주희 모신 朱子廟… 중국인들 큰 관심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차이 나는 남도-중국 인연자원 ⓷ 중국에도 없는 주자 사당, 화순 주자묘||주자학의 시조 주희 모신 사당 ‘주자묘’ ||전국 유일, 중국에 없어 요우커 큰 관심 ||시진핑 방한해 화순 주자 거론 ‘유명세’ ||주자의 증손자이자 ‘신안 주씨’ 시조인 ||청계공 ‘주잠’ 포함 6인의 위패 모셔져
  • 입력 : 2022. 07.06(수) 14:28
  • 최도철 기자

화순 적벽

성리학의 중흥조 주희를 모신 화순 '朱子廟'

화순 주자묘 동상

문공 주자대제

성리학(주자학)은 유교 사상을 체계화한 학문이다. 려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조에 이르러 통치이념으로 자리매김하고 모든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기본 원리로 삼았다. 조선 500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성리학의 근간이 되는 주자학의 시조는 중국 송나라의 주자(朱子)이다.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남도-중국 인연자원 시리즈 세 번째로 중국에도 없는 주자 사당 화순의 '주자묘'를 싣는다

남도땅 화순에는 주자학의 시조 주희를 모신 전국 유일의 사당인 주자묘를 비롯해, 중국 양쯔강 적벽과 같은 이름을 가진 적벽, 중국 3대 혁명음악가 정율성, 철감선사와 중국의 조주 종심선사를 모신 쌍봉사 등 중국과 인연이 있는 역사 문화 자원이 많다.

그 가운데 주희를 주향으로 모신 사당 주자묘(朱子廟)를 먼저 살핀다. 주자(朱子)는 누구인가. 주자(1130∼1200)는 중국 남송시대의 인물이다. 성리학자이면서 사상가, 철학자, 교육자, 시인으로 '주자문집', '사서집주' 등 120여 종, 400여 권의 책을 펴냈다.

주자학의 시조로 불리는 주자의 이름은 희(熹)이다. 일생을 바쳐 성리학을 집대성했다. 남송 시절에는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사후 그의 사상은 학계에서 주류적 위치를 점했다. 이후 성리학은 명, 청, 조선에 이어 에도막부에서도 관학의 지위를 얻게 된다.

특히 양명학 등이 인기를 얻은 명나라나 에도막부와는 달리 조선은 통치이념으로 자리매김하고 모든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기본 원리로 삼아 조선조 500년 내내 성리학이 주류 학설로서 사회를 지배했다.

중국에도 없는 주자묘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곳 화순군 능주면 천덕리 연주산 기슭에 있는 이유가 뭘까.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주자학은 주자의 증손인 청계 주잠(朱潛)에 의해 이 땅에 들어왔다. 남송시대이던 1224년 주잠이 고려로 망명을 하면서다. 몽골이 남송을 쳐들어 왔다. 하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 남송에 크게 실망한다. 남송에서 학문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한림학사, 비서각 직학사를 역임했던 주잠은 '오랑캐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두 아들과 딸을 비롯해 7명의 학사를 데리고 남송을 떠나 뱃길로 고려를 향한다.

주잠은 나주 영산포에 첫발을 내디뎠으나, 이후 원나라의 압송 요구를 피해 지금의 화순 능주인 능성으로 숨어들어 신안 주씨(新安 朱氏)의 시조가 됐다.

주자묘는 1905년 신안 주씨 문중에서 창건했다. 처음에는 영모당(永慕堂)으로 건축했다가 1978년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재축됐다. 사당 안에는 신안 주씨의 시조인 청계공 '주잠'을 포함해 모두 6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해마다 5월 5일이 되면 전국에서 신안 주씨들이 모여 이곳에서 제례를 지낸다.

주자묘는 전체 2단으로 조성됐다. 부지 상단에는 사당 구역이 위치하고, 하단에는 '동서재'라는 강학 공간이 들어서 있다. 상단과 하단 주위는 담장이 반듯하게 둘러 있고 각각의 구역에 삼문이 있다. 주자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한옥형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중앙 칸에 3구, 양 협간에 2구를 놓은 다포식이다. 건물 외부에는 단청이 화려하게 되어 있고 벽에는 주희의 삶을 조명한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지난 2011년 화순군 향토 문화유산 제53호로 지정된 주자묘는 성리학의 시조인 '주희'라는 역사적 인물의 사당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 전국에서 유일한 주자 사당이라는 희소성을 가진다.

주자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화젯거리다. 중국에도 없는 유학의 중흥조 주자의 사당이 한국에 있기 때문이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양국 간 상호교류에 기여한 역사적인 인물로 화순의 주자 등을 거론한 바 있다.

중국인 관광객 '요우커'를 유치하기 위해 주자묘를 관광자원화해 중국인 필수 관광코스가 되도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이다.

화순 적벽

한국속의 작은 중국, 화순에는 중국 적벽과 닮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60호 '화순적벽'도 있다.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보산리, 장항리 일대 7㎞에 걸쳐 있는 붉은 절벽이다. 동복댐 상류에 있는 노루목 적벽과 물염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이 대표적이다.

양쯔강 '적벽'은 중국 후한 말 208년, 조조가 유비, 손권 연합군과 싸웠던 곳이다. 100만 조조 대군이 적벽에서 대패하여 결국 중국이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로 삼분되어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유명한 '적벽대전'의 배경이다.

화순 적벽은 중국 적벽보다 규모는 작지만, 비경은 견줄만하다. 애초에는 돌의 색깔이 붉어 '석벽'이라고 불리어오던 것을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에 유배중이던 명유(名儒)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적벽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이후 많은 풍류(風流)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들러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화순의 절경을 배경으로 국적을 초월한 두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 가무극이 화순에서 공연돼 눈길을 끌기도 했다. 가무극 '적벽지애(赤壁之愛) - 사랑, 적벽에 물들다'이다.

'적벽지애'는 천하제일경 화순적벽과 운주사, 주자묘 등을 배경으로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가 보낸 몽고의 자객들에게 쫓기고 있는 송나라의 유학자 주잠의 딸 주홍과 그를 보호하려는 고려 청년 구존유의 운명 같은 사랑을 통해 국적을 초월한 두 남녀의 아름다운 인연을 보여준다.

특히 주희의 증손인 주잠이 고려 고종 때 망명해 신안 주씨의 시조가 되면서 능주에 건립된 주자묘에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기획됐다.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전, 배를 타고 중국에서 건너온 한 여인이 화순적벽 앞에서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 했다. 주잠의 딸 주홍이다.

원나라에게 쫓겨 화순 능주에 있는 구씨 집성촌에 은거했던 주잠은 능성 구씨 집안 구존유를 사위로 맞아들인다. 낯선 이국땅인 화순에 주자를 모시는 사당인 주자묘가 있는 것도 그의 후손인 주잠과 고려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중국인들은 지금도 주자묘에 들르면 그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