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노영필> 100일, 그리고 50일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테마칼럼
교육의 창·노영필> 100일, 그리고 50일
노영필 교육평론가·철학박사
  • 입력 : 2022. 08.28(일) 16:11
  • 편집에디터
노영필 교육 평론가
우리 문화는 새 생명이 일곱이레를 넘기고 100일을 넘기는 것을 소중한 의미로 새겼다. 대통령과 교육감이야기다. 대통령은 100일을 기점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29.6%가 '잘 한다', 63.4%가 '못한다'고 했다. 100일도 안 되어 20%대로 여론은 차갑게 식었다. 안타깝게도 교육감 여론조사는 나오지 않았다.

선거는 참으로 미묘한 세계다. 평소 여러 이야기가 쏟아지지만 표심은 여지없이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집권 기간 내내 눈여겨보고 있다가 표심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국민투표야말로 "차라리 아인슈타인이 대수학을 맞게 풀었는지를 판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거나, 조종사가 어느 활주로에 착륙해야 할지를 두고 승객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지적한 것이 맞을까?

그의 지적대로라면 민주주의에서 '투표'는 최고의 코미디가 된 것이다. '선거'에서 유권자를 향해 "국민만 보고,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 표현들을 들을 때마다 의아해졌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국민'이란 표현을 자기 식으로 아전인수해 받아들이는 착시를 한다. 정말로 국민 개개인에게 물어본 결과를 합산하면 보다 합리적 결정을 내리거나 진실에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될까?

선거과정에서 등장한 이슈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만한 배경지식을 가진 유권자들이 얼마나 될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만 그 결과를 이치에 합당하다는 '합리성(合理性)에 맞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까? 작금의 투표는 결코 '이치의 옳고 그름'을 확인하는 절차가 아닌 것같다.

과문한지 모르지만 윤석열정부는 국가교육에 대한 뚜렷한 교육청사진이 없었다. 사실, 집권 시나리오가 없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이는 교육감도 마찬가지다. 투표 이후 승리자들의 속내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집권여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리를 둘러싼 암투가 법적 싸움으로까지 번지면서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어둔'꼴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대선이나 교육감선거 이후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인사 문제가 그렇고 교육관련 정책집행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문제다. 사안이 생겨도 처리하는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5세 취학을 교육정책으로 꺼낸 뒤 후폭풍을 맞아 교육부장관이 중도 하차했다. 우리 시교육청에서는 방학중 급식문제를 들고 나왔다가 역풍을 맞고 흐지부지됐다. 그야말로 대통령이나 교육감의 행보가 피장파장 50보 100보다.

대통령 취임 후 장관임명을 두고 끊임없는 소모전을 펼치다가 인사청문동의서도 채택되지 못한 채 임명이 강행되었다. 비판적 목소리 앞에서는 전 정권타령으로 말문을 막았다. 시교육청은 과장급 이상 고위직 보직자를 지명하는 9월 정기인사에서 말이 많다. 임명된 지 6개월만에 바뀐다거나 '포용'이라는 정책 안에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왜 뽑았는지 모르겠다'며 시끄럽다. 50보 100보다.

이런 배경들이 모두 준비된 후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이유다. 단적으로 시스템에 의해 집행되지 않아서 일 것이다. 포용교육, 포용교육하지만 포용은 방법이지 방향을 이끄는 슬로건이 아니다. 예컨대 당선자의 집권철학이 '미래교육'이거나 '인성교육'일 때 시민(유권자)를 모시고,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을 잘 반영하기 위해 포용의 방법으로 조율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다수 득표자가 무조건 당선되고 그들에게 모두 맡기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선거의 폐단이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이 맞을지도 모른다. 유권자는 '느낌'으로 선택할 뿐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분석적 투표행위를 하지 않는다. 느낌이 만든 당선은 유권자들의 뒤늦은 후회를 만든다. 더 더욱 후보자를 혐오하거나 선거 자체의 무용론에 빠진 사람들이 투표장에 나가지 않은 것도 합리성의 유실로 나타나는 사회 현상이다. 민주주의가 보완될 수 있으려면 합리성을 높이는 교육과 유권자의 합리적 노력이 뒤따르지 않고는 뒤늦게 찾아오는 실망을 회복할 수 없다. 더욱 씁쓸한 이유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