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내면을 채운 조선 선비의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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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면을 채운 조선 선비의 산행기
  • 입력 : 2022. 09.08(목) 09:00
  • 이용환 기자

조선 말기 의병장 최익현이 '신선의 종자가 거처하는 듯하다'고 쓴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 이달 초 제11호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많은 비가 내리면서 백록담이 만수(滿水)를 이루고 있다. 독자 김경미씨 제공

산문기행. 민음사 제공

산문기행

심경호 | 민음사 | 3만원

옛사람은 산을 오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특히 조선 시대 선인들은 산놀이에서 일어나는 감흥을 시와 산문으로 적어 유산록(遊山錄)으로 남겼다. 당대 사람들에게 산을 즐기는 특별한 매개체였던 유산록은 오늘날 명문장과 옛이야기가 가득한 고전으로 남아 등산의 흥취를 더한다.

동양고전의 권위자 심경호가 쓴 '산문기행'은 산의 참모습을 즐기는 방법을 생생하게 환기하는 책이다. 국토의 3분의 2가 산인 한국은 산에 접근하기 쉬운 만큼 등산을 취미로 꼽는 사람이 많다. 등산 애호가들은 전국 명산을 섭렵하며 여가를 즐기고, 코로나 대유행 중 새로 등산에 입문한 초심자들도 '나만의 등산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널리 공유한다. 등산을 향한 열정이 식을 줄 모르는 지금 같은 때, 옛사람의 산행기는 등산의 즐거움과 감동을 더욱 북돋아 준다.

저자는 "산에 오르는 행위는 자신의 삶을 전환하려는 의지의 행위"라며 "산에 오른다는 것은 창조적 능력, 강인한 의지, 충만한 정신력을 되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산문기행'은 지금까지 전하는 조선 시대 산행기 560여 편 중에서 자연의 진면목을 대하며 정신적 자유를 되찾고자 한 사유 방식이 담긴 65편을 엄선했다. 도성의 선비가 마흔 중반이 되어서야 오른 동네 뒷산에서부터 지금은 가 볼 수 없는 북녘의 명산까지, 우리 산 48곳에 대해 선인 56명이 남긴 기록이다.

옛사람은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넉넉한 체력에 더해 정신의 결단이 필요하며, 정신의 자유 속에서 진정한 산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산을 오르며 내면을 채우는 일은 글을 쓸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산을 가까이 두고 아낀 선비들의 사유 세계를 총망라한 이 책은 등산의 격을 높이는 유일무이한 안내서가 되어 준다.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뛰어나다. 한라산 정상에서 제주의 풍물과 고적을 세세히 기록한 제주 목사 이형상의 글은 지역의 독특한 산세를 과거의 눈으로 직접 관찰했다는 점에서, 백두산 정상을 둘러보고 정계비를 세운 청나라 관료의 행적을 전언으로 정리한 중인 계급의 문인 홍세태의 글은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 문제가 시작된 역사적 현장을 전한다는 점에서 귀중하다.

등람의 여정에서 삶의 이치를 구하는 장면은 '산문기행'의 백미다. 지리산을 사랑해 일생에 열일곱 번 오른 북인의 대표 문인 조식은 말했다. "위로 올라가는 것도 이 사람이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바로 이 사람이다. 다만 한 번 발을 들어 내딛는 사이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조선 중기 문인 홍태유도 설악산 십이폭동을 찾아 "그 기이함을 사랑해 머뭇거리면서 차마 떠나기 어려웠으나 너무 맑아서 오래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조선 말기 의병장으로 널리 알려진 최익현의 문장은 먼 옛날 한라산 백록담의 모습을 생생히 전한다. "맑고 환하며 깨끗하고 결백해 먼지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은연히 신선의 종자가 거처하는 듯하다."

저자는 국토 산하에 관한 옛 시문 연구와 유산기 논평을 종합해 엄선한 글을 섬세하게 번역하고, 현재의 의미에 비추어 해설했다. 한반도 전역에서 작성된 유산기를 중부의 산, 남부의 산, 북부의 산, 민족의 성산 등 4부로 나누고, 5부에 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성찰한 산문 세 편을 별도로 수록했다.

나의 산행 체험과 조선 선비의 기록을 비교하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신만의 유산기를 남기는 일, 그 또한 산이 주는 즐거움이다.

이용환 기자 yh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