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환자 치료 외면하고 고문·폭행·암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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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중증 환자 치료 외면하고 고문·폭행·암매장"
●80년 광주교도소 교도관 증언||"중상자 창고 바닥에 방치해 숨져"||"군인들 잔디밭에 시신 묻고 위장"||재소자 "기억나는 사망자만 52명"
  • 입력 : 2022. 09.27(화) 17:27
  • 김혜인 기자
광주 북구 옛 광주교도소에서 신원 확인이 안된 유골 수십구가 발견됐다. 사진은 시신 수습당시 영상. 518재단 제공
지난 26일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 묘지에서 발굴된 유골의 신원이 5·18 행방불명자로 확인되면서 암매장이 사실로 밝혀지자 본보가 2017년에 집중보도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재조명받고 있다.

2017년 9월 본보는 광주교도소에 재직했던 전 교도관들의 증언과 재소자의 목격담을 통해 교도소 내에서 사망 방치, 각종 고문과 폭행, 암매장 등이 벌어진 정황을 보도했다.

보도 속 내용은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시위 도중 연행된 일반 시민이었다는 점에서 계엄군이 광주교도소에서 벌인 참극은 인권유린 그 자체였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 의무과에 재직했던 민경덕 전 교도관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80년 5월 참혹했던 교도소 내 시위대 치료 실태를 폭로했다.

민 전 교도관의 증언에 따르면 80년 5월21일부터 광주교도소에 시위대가 연행됐으며 최소 50명 이상이 의식을 잃은 채로 군용 트럭에 실려왔다. 의무실이 있었지만 수용하기가 어려워 창고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중증의 화상 환자가 대다수였으며 일부는 총상까지 입었으나 제대로 된 치료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본보가 입수한 '광주사태시 소요체포자 치료현황' 문건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문건을 보면 21일 치료 받은 체포자 수가 143명이며, 5시간 20분동안 치료가 진행됐지만 이에 동원된 의무직원은 4명 뿐이었다. 더욱이 실제 의사는 중위 계급장을 단 군의관 1명 뿐이었다.

민 전 교도관은 "첫날 치료를 제대로 못하고 다음 날 아침에 가보니 어떤 사람이 몸을 못 움직이니까 그런 건지 누운 채로 대소변을 봤더라. 그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부상자가 더러 있었다"며 "다음날에는 그 환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교도관 뿐만 아니라 당시 광주교도소에 구금됐다가 풀려난 재소자도 중상자들의 사망과 암매장 정황을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당시 전남방직 근로자였던 강길조 씨는 5월18일 전남대 앞 교차로에서 공수부대원에게 쫓기는 학생들을 도와주다 군인들에게 잡혀 모진 폭행을 당했다. 이후 21일 광주교도소에 끌려온 후 먼저 들어온 중상자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강씨는 중상자 뿐만 아니라 군인들의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사망자가 계속해서 늘어나자 계엄군의 만행을 외부에 알려야한다는 생각에 몰래 종이쪽지에 '정(正)'자 표시로 죽어 나간 사람의 수를 셌다고 했다.

강씨는 "정확히 52명까지 센 기억이 난다. 당시 군인들이 찍은 사망자 사진이 군 당국에 분명히 남아있을 것"이라며 "많은 시신이 헬기로 이송됐거나 암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엄군의 시신처리과정이 낱낱이 공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치료 방치뿐만 아니라 시신을 땅에 파묻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교도관의 증언도 있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 보안과에 재직한 교도관 A씨는 군인들의 조사를 받다 죽어 나가는 사람을 직접 봤다고 생생히 설명했다. A씨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창고 옆 교무과 건물 2층에 계엄군이 설치한 조사실에 들어갔던 한 시민이 주검이 된 채 끌려 나오는 모습을 직접 봤다고 밝혔다.

취재 당시 A씨는 "군인들이 야전삽으로 잔디를 들어 올린 뒤 흙을 파내 시신을 묻고 잔디를 원위치에 다시 심는 방법으로 위장했다. 계엄군이 철수한 뒤 현장을 찾았을 땐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도 어려웠다"고 이야기했다.

전두환 씨가 사망하기전까지 끝내 부인한 광주교도소 방문에 대한 의혹에 대해서도 복수의 전직 교도관 증언을 종합해 사실로 확인됐다.

먼저 민 전 교도관은 "평소 오전 8시에 출근하는데 정복으로 갈아입고 사무실에 가니까 건물 밖에 과장급 이상 간부를 포함해 10여명이 도열해 있었다"면서 "간부 한 명이 얼른 손짓해서 달려갔더니 전씨가 차례로 인사를 건네 나까지 얼떨결에 악수를 했다. 그러고 나서 교도소를 떠났다"고 말했다.

A씨 역시 "근무 때문에 아침 조회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직원들을 통해 전해 들은 바로는 전씨가 당시 돈으로 70~80만원 상당의 격려금을 전달했다"며 "표면적으로는 격려금을 전달한 것이지만, 교도관들이 차후에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게 입막음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교도관들도 당시 어쩔수 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김혜인 기자 kh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