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피해 회복 '외길' 20년 …열정이 세상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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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피해 회복 '외길' 20년 …열정이 세상을 바꾸다
대법원 '피해자 구제' 판결에도 바뀌지 않는 세상 ||한과 어둠의 터널 속에 지내고 있는 피해자들 ||"일제 피해자 문제는 단순한 과거사 아니다"||우리가 풀지 못하면 미래 세대에 다시 '짐'
  • 입력 : 2018. 10.08(월) 08:42
  • 홍성장 기자

 소송에서 많이 이기는 변호사가 유능한 변호사다. 당연한 세상 이치다. 그런데 ‘질 게 뻔한 싸움’을 마다치 않는 변호사가 있다. 당연한 세상 이치에 비춰보면 ‘바보짓’을 하는 변호사고, ‘무능한 변호사’다. 피해를 본 ‘사실’이 있고, 받은 것을 더 달라 하는 것도 아니기에 ‘당연한 싸움’이다는 생각뿐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어쩌면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에서는 당연히 이길 싸움이라 시작했다. 그것이 정의고, 법치국가라는 믿음이다. 일제강점기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뛰고 있는 최봉태 변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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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의 세월이다. 



그가 일제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1997년이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일본유학이 계기였다. 원래는 노동법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그 시절은 일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본격적으로 소송을 시작했던 시기다. 당시 일본에서 열렸던 일제 피해자 관련 재판을 방청할 기회가 있었는데, 일본의 양심적 법조인들이 열정적으로 한국인 피해자들을 법적 투쟁을 돕는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기 나라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닌데, '역적' 소리까지 들어가며 열정적으로 한국인 피해자들을 위해 변호하던 그들의 모습. 부끄러웠고 충격이었다. 한국 변호사로서 양심의 가책도 느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일제 전쟁 피해 진상을 파악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달래는 작업에 직접 뛰어들었다. 사비를 털어 일본을 오가며 일본 시민단체와 손잡고 전후 보상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만든 것도 그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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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0년 5월에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6명과 함께 부산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전범 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의 배상책임을 요구하는 소송이었다. 쉽게 이길 것으로 생각했다. 피해자가 피해를 보았고, 보상은 하나도 받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정의가 있다면 한국 법원에서 구제를 해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일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임금을 받았는데 더 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도 아니었다. 



12년에 걸친 법정 다툼의 시작이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을 앞세웠다. 국내 기업이 해외 다국적기업과 소송을 벌일 대 주로 외국기업의 변론을 맡았던 김앤장이다. 최 변호사는 국내 유명 로펌 소속도 아니다. ‘전관 출신’도 아니다. 중량감으로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김앤장은 특유의 논리로 일본 전범 기업을 대변했다. 일본에서 패소 판결이 확정된 데다 손해배상을 위한 시효도 끝났다며 일본 기업이 배상해줄 책임이 없다는 논리를 폈다. 초반 소송은 예상대로 흘렀다. 



1심은 김앤장을 내세운 미시비씨중공업의 손을 들어줬다. 김앤장이 편 '시효가 지났다'는 논리를 1심 재판부가 받아들였다. 소송을 시작한 지 6년이 지난 2006년의 일이다. 



포기할 수 없었다. ‘중대한 인권침해는 시효가 문제 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나오기 시작했던 때다. 2심은 더 황당한 판단을 했다. 2009년 2심 재판부는 ‘일본에서 패소 판결이 확정된 사안이기에 그에 반하는 판결을 할 수 없다’며 미씨비시중공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판결이 났으니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한다, 식민지 논리 그대로였다. 일반적 사안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일본 판사가 신중한 판단을 했으니 존중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식민지 범죄’에 관련된 일이다. 피해국가가 가해국의 판결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헌법 질서에서 맞지 않은 논리다는 생각이 앞섰다. 대법원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해줄 것이라 믿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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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열정과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첫 소송이 시작된 지 12년의 세월이 흐른 2012년 5월, 대법원은 일제 강제징용자에 대한 미쓰비시중공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며 그간 판결을 파기환송 했다. 자그마치 12년에 걸친 법정 다툼의 끝이었다. 38세의 한창나이에 소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던 최 변호사는 지천명이 돼서야 승소 판결문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에게 소송을 맡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그사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소중한 결실이었다. 그간 일본과 한국 법정에서의 잇따른 소송 패소 후에 피해자들이 얻어낸 첫 결과물이었다. 최봉태 변호사의 열정과 믿음이 없었다면 손에 쥘 수 없었던 결과물이기도 했다. 



파기 환송된 재판은 고등법원에서의 피해자들이 승소 이후 2013년 다시 대법원으로 재상고 됐다. 최 변호사는 크게 문제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별걱정도 하지 않았고,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란 믿음이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대법원은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이른바 ‘사법 농단’ 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충격적인 사법 농단의 그늘 뒤에서,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거래의 대상이 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는 ‘넌센스’이고,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고 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가 대통령의 눈치를 볼 사안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일본 재판부의 달라진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2007년 4월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하며 자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피해국 사법부에서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거래’의 대상이 돼 있는 현실이었다. 



그는 우리 외교부로 탓을 돌렸다. 3권이 나뉜 나라에서 외교부도 법원의 판결을 따라야 하지만, 외교부가 사법부를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없다고 하지만, 논리적으로 틀린 이야기를 하면 모르지만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너의 나라 최고재판소도 자발적으로 구제하라 판단했고 미국과 중국에는 실제 구제도 했는데 왜 우리 한국만 안된다고 고집부리냐고 협상하면 될 일 아닙니까. 그렇게 일본 정부를 설득했다면, 일본 정부도 태도를 바꿔 진즉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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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열정’이 가져온 변화는 또 있다. 그는 2011년 8월,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는 취지의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이다. 하지만 애초 기대했던 것과 달리 현재까지도 크게 바뀐 게 없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쉬움과 한숨뿐이다. 그에겐 여전히 ‘진정한 해방’이 아닌 이유다. 아직도 가해자로부터 사죄를 받지 못하고, 해방 70년이 훌쩍 넘도록 그 피해에 대한 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한과 어둠의 터널 속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관심’. 그가 20년 넘도록 과거 청산을 위해 싸워오면서 가장 힘들었다. 국민은 삼일절과 광복절 등 기념일에만 반짝 관심을 가졌다가 금방 잊어버린다. 언론은 일본 정부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앵무새 역할을 할 뿐이고, 정부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나서지 않으니 일본도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쉬움이 가득한 그의 이야기다.



 “피해자들이 멀리 있고, 힘없고, 돈 없는 약자이기 때문이죠. 돈 있는 사람들이 일제에 그렇게 끌려갔다면 이처럼 오랫동안 해결도지 않았을까요. 가난한 농촌의 사람들, 넉넉하지 못해 배움이 부족했던 분들이 끌려갔으니 이런 현실일 겁니다. 돌아와서도 한국사회에서 나름 힘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안 되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도 관심을 끌지 못한 측면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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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긴, 힘든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법적 정의’는 어느 정도 세워졌다 생각한다. 어찌 됐건 대법원이 피해자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대법원판결에 다른 후속 조치까지는 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는 이제 일제 피해자들을 위한 공익재단을 만드는 일이 남았다고 했다. ‘2+2 재단’이다. 한일 정부와 청구권 협정 혜택을 받은 국내 기업, 강제징용에 관련된 일본 기업이 주체가 되는 공익재단이다. 재단을 통해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한일 청소년 교류 등을 통해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드는 교육에 나서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최 변호사는 대한변호사협회 등의 도움을 받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인권 재단 설립에 관한 특별법(가칭)’을 국회에 발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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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법언(法言)을 강조했다. 살아있을 동안 구제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살아있을 때 구제해 주는 것이 정의의 원칙에 맞다는 의미다. 



“피해자들이 살아 있을 동안 정의가 회복되어야지요. 다 돌아가신 뒤 승소 판결이 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정의가 빨라 수복돼야 합니다. 그분들이 '내가 옳았다'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셔야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지요. 살아계실 동안 재판에 지고 또 지고 그렇게 돌아가시면 얼마나 억울하시겠습니까.” 



최 변호사는 “일제 피해자 문제는 단순한 과거사 문제가 아니다”고도 했다. 오히려 “국제 평화 실현이라는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가 풀어야 할 미래의 문제”라고도 했다. 



“주위에 있는 전쟁 피해자들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면 우리도 전쟁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풀지 못하면 우리의 아들 딸들이 또 다른 전쟁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관심’이 한국정부와 전쟁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행토록 하는 강력한 무기요, 그 힘을 바탕으로 진정 책임을 져야 할 일본 정부와 일본 내 전범 기업의 사죄를 받아 낼 수 있을 것이라 그는 굳게 믿는다. 



그가 20년의 세월, 한결같은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일제 피해자 피해 회복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홍성장 기자 seongjang.ho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