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문화5>한국 실험영화의 개척자 '카이두 클럽'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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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아시아의 문화5>한국 실험영화의 개척자 '카이두 클럽'을 아시나요
70년대 이화여대 출신들 결성…가부장적 사회에 반기||한국 영화사와 공생못한 채 반백년 맞아…‘고군분투’||||
  • 입력 : 2019. 11.14(목) 13:34
  • 박상지 기자

카이두 클럽(감독 한옥희) 의 1977년 작품 '무제 77-A'의 한 장면

영화계 안팎으로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이라는 타이틀을 건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생각보다 영화계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영화사를 훑어보고, 각 영화제에서는 어느 때보다 한국영화에 비중을 두면서 자축하는 해를 보내고 있다. 한편, '영화'가 가지는 대중적 친밀성, '상영'이라는 단발성이 각종 문화행사 등에서 한국영화 100년의 해라는 시기적절한 끼워 맞추기 용도로 활용되는 사례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100년이라는 시간은 분명 축하할 일이지만 상업영화 저변의 영화들은 그 어느 때보다 대중들의 무관심을 톡톡히 체감하는 1년을 견뎌야하는 것이다.

최초의 한국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단성사에서 보여준 김도산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에서 시작한다. '의리적 구토'는 현재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상영방식이 아닌, 연극 막간에 활동사진들을 스크린에 영사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극영화 형식으로 처음 선보인 윤백남의 1923년 작품 '월하의 맹서', 조선인 자본이 최초로 투입된 김영환의 1925년 작품 '장화홍련전' 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1962년 '영화의 날 제정위원회'에서 '의리적 구토'를 최초의 영화로 명명하면서 그 기준을 따르고 있다.

영화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가장 강력한 저항 매체이자 시대에 편승한 국책 동반자로까지 다양한 과정들을 겪어왔다. 한국영화도 일제강점기, 6·25전쟁, 유신체제, 5·18민주화운동부터 최근의 문화계 블랙리스트까지 시기별 검열과 표현의 통제에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필자는 그 안에서도 1972년 유신체제가 들어서기 전후, 즉 한국영화가 반백년을 맞이한 전후 시기에 나타난 일부 영화들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싶다.

1973년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정책을 전담하고 문화공보부가 영화허가제를 통해 승인된 영화만 제작할 수 있게 하면서 국가가 영화를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독립영화제작사나 신생영화사, 소형영화 제작자들의 진입은 매우 어려웠으며 시나리오와 필름의 이중 검열이 이루어지면서 내용적, 형식적으로 진부한 작품들이 대다수였다.

한편, 이 시기는 대학 내에 영화학과들이 생겨나고 교육을 통해 영화를 배운 인력들이 배출되면서 미학적 가치와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은 개별적인 작은 소모임을 만들어 자신들만의 작품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이화여대 출신들로 구성된 '카이두 클럽'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반기, 표현의 다양성 등을 실험영화 형식으로 보여줬던 최초의 여성 집단이다.

'카이두 클럽'은 영화학도들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국어국문학과, 시청각 교육과, 신문방송학과, 순수미술학과 등을 전공한 구성원들(한옥희, 김점선, 한순애, 이정희, 정묘숙, 왕규원)이 연출, 각본, 촬영, 미술 등을 역할을 맡아 공동제작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한 영화관련 잡지들은 4·19 등 근대화 과정을 거친 이삼십 대들이 주 독자였고, 영화를 오락이 아닌 보다 예술적으로 향유하고 싶은 이들도 늘어났다. 시네필도 이 시기부터 생겨났다고 볼 수 있으며, 독일문화원, 프랑스문화원 등에서 상영하는 실험영화나 예술영화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형식들을 발견해나갔다.

'카이두 클럽'의 멤버들도 마찬가지로 주한 해외문화원 등에서 상영하던 영화들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1975년 미공보원에서 자신들의 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했다. '여성과 영화세계'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은 당시 시대의 가장 큰 제재를 받고 있던 '여성'과 '영화'를 전면에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대항한 주요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프로그램은 카이두 클럽, 그리고 그녀들과 교류했던 영화평론가 등이 참여했으며, '영화예술에 있어서의 여성참여도의 확대',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 '스크린에 비친 여성백태' 등의 소주제 발표와 자신들이 제작한 실험영화 상영으로 구성하였다.

"한국영화에는 여자가 없다.

..... '女․ 女․ 女'의 옴니버스 영화를 검열하는 사람이 '女․ 女․ 女'를 합하면 姦(간사할 간)이 되니 타이틀을 바꾸라고 호령을 했던 기억이 있는 한 한국영화에는 여자가 없다. ..... 제인 폰다와 마리나 멜쿠리니의 그 성난 얼굴이 우리의 주변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 이 모임은 '잃어버린 女子'와 '일곱번째의 뮤즈'를 찾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일 수밖에 없다."

(카이두 실험영화연구회, '여성과 영화세계' 심포지엄 자료집 내 취지문, 1975.4.19.)

70년대 중반 제도권 바깥에서 활동했던 '카이두 클럽'과 달리 60년대에 소형영화 동호회(시네포엠)에서 일찍이 제도권 영화로 진입한 유현목은 당시 미국의 실험영화 전성기를 직접 체험한 후 1965년도에 '춘몽'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여주인공의 나체 뒷모습이 6초 동안 등장한 것이 국내 영화 최초로 '음화 제조죄'라는 판결을 받으면서 감독인 유현목도 불구속 기소되었다. 유현목은 이 판결에 대해 '춘몽'이 상업영화가 아닌 표현과 상징적 기법들을 시도한 실험영화임을 주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영화학자, 영화평론가, 영화기자 등이 유신체제 전후의 권위주의 정책에 대해 지적하며 영화의 예술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 등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제도권에서 활동했던 '카이두 클럽'과 유현목의 도발을 화제성으로 다루거나 문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당시 시대에 필요했던 영화운동의 젊은 선두주자로 바라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한 한국영화의 질 향상을 위해 대학의 영화과에서 예술영화와 실험영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를 요청한다.

'카이두 클럽'은 6~7편의 작품들을 함께 만들면서 진입이 불가한 영화관 바깥에서 '실험영화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명동 한복판에서 퍼포먼스 등을 통해 불특정 관객들과 만나는 자리들을 모색했다. ACC시네마테크는 '카이두 클럽'의 주요 작품과 자료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작년 오버하우젠 국제영화제에 작품 '구멍'을 상영했고, 올해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2분 40초'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파장(Wavelength)'이라는 실험·예술영화 부문에 공식 초청 상영되었다. 위와 같은 성과는 그녀들의 진취적이었던 활동을 국제적으로 알림과 동시에 주요 영화제에 상영됨으로써 작품성도 인정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영화사 100년을 맞아 봉준호의 '기생충'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국내 영화계와 언론들이 주목할 때, 함께 상영됐던 '카이두 클럽'에 대해 궁금해 했던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이들의 작품들에 크게 관심을 두었던 곳은 '싱가포르 내셔널 뮤지엄',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이었다.

70년대 전후부터 영화형식의 다양성을 시도해온 영화들은 이미 포화된 상업영화 바깥으로 미끄러지면서 여전히 고군분투다. 1991년 '연극영화의 해' 제정과 함께 당시 장관이었던 이어령은 주요사업의 일환으로 시네마테크 설립과 실험영화 등의 상영 공간 마련 등을 내걸었으나, 사업 담당자들의 장르에 대한 이해부족, 제한된 영화 상영 등으로 별 성과를 보지 못했다. 100주년을 맞은 한국영화의 주요 정책들은 산업으로서의 영화와 VR, 4D영화, 모바일 등의 기술론들 중심으로 부각된다. 한국영화 반(半)백년 전 새로운 영화를 꿈꾸며 등장한 실험영화는 여전히 한국영화사와 공생하지 못한 반(反)백년을 맞이했다. 앞으로 국내의 실험영화 군들이 작품으로써 이해받고 생존하기 위해 찾아야할 곳은 더 이상 영화관이 아닌 미술관일지도 모른다.

카이두 클럽이 개최한 심포지엄 '여성과 영화세계', 1974년 4월

카이두 클럽의 활동이 실린 기사. '제1회 실험영화 페스티벌-한국영화 장래를 맡겨라', 선데이 서울, 1974년

캐나다 영화전문지 '시네마스코프' 에서는 제44회 토론토 국제영화제를 맞아 영화제 화제작들을 소개하면서, '카이두 클럽'에 대해 3페이지에 걸쳐 특집 기사를 다루었다.

김지하 아시아문화원 연구기획팀(ACC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