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영의 그림 큐레이션>가을의 끝자락에 건네는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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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영의 그림 큐레이션
문희영의 그림 큐레이션>가을의 끝자락에 건네는 인사.
존 에버릿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눈먼 소녀의 더 깊은 눈.||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 빈 방의 빛과 같은 예술.
  • 입력 : 2019. 11.19(화) 12:42
  • 편집에디터

가을의 끝자락에 건네는 인사.

지난 해 11월 <그림 큐레이션>의 첫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삶이 그려낸 그림들'이란 주제로 모지스 할머니, 빌 트레일러 할아버지, 김순복 할머니의 그림을 보며 미술작품을 어떻게 봐야할지, 보고 또 보길 그렇게 찬찬히 들여다보기를 바라며 써 오던 연재글이 열여섯 번째 이야기로 마지막 인사를 한다.

1년여 동안 여러 키워드들로 많은 그림들을 엮어 보았다. 에너지, 용기, 희망, 공존, 반전, 일상, 인간, 여성, 독서, 시간 등 열여섯 꼭지가 채워졌다. 계절의 순환, 삶의 모습 등 끝없이 순환하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겨졌다. 가을의 끝자락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마음을 대신한 그림들을 큐레이션하며 첫 이야기를 되새겨 본다. 작가가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만큼 아주 긴 호흡으로 작품을 볼 수 있기를, 그렇게 꼭 나의 인생 그림 하나쯤은 있기를 바라며, 마지막 인사의 마음을 담은 그림들을 소개한다.

눈 먼 소녀의 더 깊은 눈.

화면 한 가운데 그림의 주인공인 두 소녀가 앉아있다. 왼편의 소녀는 앞을 보지 못하는 듯 눈이 감겨있고, 그 옆 작은 소녀는 고개를 돌려 화면 뒤편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서로 각기 다른 지점을 보고 있다. 동생인 듯 어린 소녀는 하늘에 찬란하게 떠오른 무지개에 넋이 빠졌다. 아마 방금 전까지 비가 쏟아졌다 개었는지 쌍둥이처럼 하늘을 뚫고 나온 무지개는 선명하게 보인다. 왼쪽 언니인 듯 더 큰 소녀는 눈을 뜨고 있지 않다. 앞을 볼 수 없지만 동생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겨 있다. 눈은 감겨있을지라도 두 손은 더 큰 눈을 가진 듯하다. 오른손으로는 바닥에 올라온 풀의 감촉을 느끼고, 왼손은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깍지를 낀 손이 야물게 느껴진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린 얼굴의 표정엔 많은 것이 담겼다. 마치 대지의 기운과 그 위에 떠도는 공기를 온몸으로 천천히 들이마시는 듯하다. 두 사람의 생계를 책임지는 악기는 눈 먼 소녀의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졌다. 막 비가 그치고 노란 물결 넘실대는 들녘 너머 피어오른 쌍무지개를 결코 볼 수 없다. 언니의 품에서 눈을 돌린 동생은 어두운 하늘 위 찬란히 떠오른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눈 먼 소녀는 비록 무지개를 볼 수 없어도 다른 모든 것들을 온 몸의 감각으로 끌어안고 있다. 대지의 촉촉한 생명력도, 비가 씻어준 맑은 공기도, 너른 들녘의 광활한 기운도, 서로를 의지하며 꽉 잡은 손끝에서 전해오는 따스한 온기까지 그 모든 것을 눈 먼 소녀의 더 깊은 눈인 마음의 눈이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보며 우리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림의 표면이 아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보는 눈, 그건 바로 마음의 눈이다. 비록 눈이 멀어도 피상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더 많은 것을 보는 소녀처럼 그림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 작가의 영혼을 만나는 것은 단지 두 눈만으로는 볼 수 없다. 두 눈과 함께 마음의 눈도 밝혀져야 볼 수 있는 것. 많은 이들의 마음의 눈이 밝혀지기를 바라본다.

존 밀레이 1854-56 캔버스에 유채, 82x60.8cm 버밍엄 박물관 및 미술관

빈 방의 빛, 삶 속의 예술

황량한 빈 방, 창문 너머 초록 나무들은 무성하지만 전면을 차지하는 커다란 방에는 오직 햇빛만이 존재한다. 이 그림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직 하나, 따스한 빛이 점차 방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빛 덕분에 칙칙하고 어두컴컴한 방은 따스한 밝음으로 환기되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아무것도 없는 그저 '빈 방'인데 천천히 황량함이 거둬지고 있는 것이다. 단지 빛에 의해서. 호퍼의 그림 속 빛은 바로 일상 속 예술이 아닐까. 눈먼 소녀가 가진 마음의 눈이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있듯, 휑한 빈 방을 꽉 채우는 빛은 삭막한 우리네 일상에서 온기를 주는 예술과도 같다. 빛은 서서히 고요하게 방 안으로 스며든다. '예술'이란 것도 단번에 삶을 바뀌게 하지는 못하지만, 서서히 방의 온기를 더해가는 빛처럼 그렇게 살 속에 스며든다. 그리고 우리네 일상을 조금은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에드워드 호퍼 1963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두 사람.

무대 위로 걸어 나온 두 사람이 인사를 한다. 무대 오른 쪽은 초록 숲이 무성하고, 막 앞으로 걸어 나와 정중히 관객에게 인사하는 두 사람. 아마도 객석에선 박수 세례가 이어지고 있으리라. 이들은 거듭 고마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은 바로 그림을 그린 장본인 에드워드 호퍼와 그의 아내 조 호퍼이다. 평생 호퍼의 곁에서 조력자 같았던 아내를 비중 있게 그린 이 그림은 실제 호퍼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남성보다 더 수줍게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온 여성. 두 사람이 함께한 생에서 늘 남편인 호퍼의 그림자가 되었지만, 이 그림에서만큼은 동등하게 주인공이 되었다. 그간의 고마움이었을까, 호퍼는 자신의 평생 동반자에게 고마움과 애틋함을 고백하듯 이 그림을 남겼다. 두 사람의 인사처럼 마지막 <그림 큐레이션>의 마지막 인사를 생각하며 이 그림을 떠올렸다.

에드워드 호퍼 1963

마지막 인사

작품은 작가가 그려내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 안에서 그림과 마주하고, 해석해간다. 삶의 무수한 감정들을 품은 많은 작품들은 때론 위로를 건네고, 때론 행복도 기쁨도 즐거움도 선사한다. 예술을 삶 안에 들이는 것은 눈 먼 소녀가 더 큰 세상을 보는 것처럼, 황량한 빈 방을 가득 채우는 햇살처럼 우리 삶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그 충만함을 많은 이들이 함께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간 <그림 큐레이션>을 봐주신 분들에게, 지면을 할애해 주신 전남일보에 감사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갤러리'예술공간 집'관장·큐레이터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