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이슈 32-1> 민주주의는 '기억'하는 자들만이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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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이슈 32-1> 민주주의는 '기억'하는 자들만이 지킬 수 있다
군부에 맞선 박승희 열사 30주기||1991년 하늘로 산화한 8명의 열사
  • 입력 : 2021. 05.02(일) 18:19
  • 노병하 기자
박승희 열사 사망 후, 전남대 정문 앞에 이어진 추모 행렬. 박승희 열사 분신항거 30주기 추모행사위원회 제공
"자유의 나무는 때마다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서 거듭나야 한다." - 토마스 제퍼슨

지난 4월 29일은 고 박승희 열사의 분신 항거 30주기였다.

박승희 열사. 2021년에 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아가 박승희 열사와 같이 당시에 산화된 4명의 열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또 몇이나 될까.

시대는 노태우 정권인 1991년이었다. 우리의 기억에서는 희미해졌지만 유난히 많은 이들이 목숨을 내던지던 시대였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해 4월 26일, 서울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이 휘두른 쇠 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또 앞서 4월 20일엔 전남지역 총학생회 연합(이하 남총련) 건설준비위원회 집회에서 전남대 최강일 학생이 경찰의 직격 최루탄을 맞고 실명당했다.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다.

4월 27일부터 학생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연세대학교에서 규탄대회를 벌였다. 부산, 광주 등 전국 20개 대학에서 강경대의 폭행치사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4월 29일 오후 6시 연세대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강군 구타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폭력살인정권 규탄 범국민결의대회'가 열린 것을 비롯해 전국 60여 개 대학에서 규탄 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날 오후 2시, 전남대학교 본부(현재 전남대학교 용봉관) 뒤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당시 전남대 학생들은 '강경대 살인 만행 규탄 및 살인정권 폭력정권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2만 학우 결의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불이야"라는 외침이 들리고 많은 이들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그들은 꽃다운 20대의 여대생이 분신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날이 박승희 열사가 분신을 한 날이다. 이어 5월 1일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학교 학생 천세용,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등이 잇따라 분신한다. 무고한 청춘들이 압제에 맞서 목숨으로 항거한 것이다. 여기에 보성고 김철수 분신, 노동자 정상순 분신, 이정순 분신투신, 대구대 손석용 분신투신 까지 분신 항거는 계속 이어졌다.

박승희 열사는 분신 직후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5월 19일 강경대 열사의 운구가 전투경찰에 막혀 광주 시내로 진입하지 못하고 대립상태가 지속되던 그 날, 끝내 세상을 떠났다.

열사의 사망 비보는 경찰과 대립 중이던 남총련 대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집에 있던 시민들마저 거리로 나왔고 경찰의 저지에 막힌 장례차를 들다시피 도로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고속도로 옆 가드레일을 뜯어내거나, 도랑을 흙과 돌로 메웠다. 마침내 학생들과 시민들은 강경대 열사의 운구를 금남로로 옮겨 도청 노제를 진행하고,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했다.

그런 시대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부터 1991년 박승희 열사까지 우리는 정의로운 청춘들의 피와 목숨을 대가로 한 걸음씩 민주주의를 향해 걸었다.

다시 2021년 오월. 5·18 41주년을 맞은 광주에서 박승희 열사를 기억하는 당시 대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기억해야지요. 기억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으니까요. 민주주의란 그런 거죠. 기억하고 되새기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켜보는 것. 그게 살아남은 자의 의무죠."

노병하 기자 bhn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