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안 암태도 농민항쟁유적비

섬이지만 농경지가 발달한 암태도 풍경. 신안군 제공

아사동맹을 전개하기 위해 돛단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암태도 주민들 모습(정광희 작, 도서문화연구원 소장)

최성환 목포대 교수
일제강점기 신안 지역에서는 섬 농민들의 소작쟁의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소작쟁의(小作爭議)는 불합리한 소작료율을 개선하기 위해 농민이 땅을 가진 지주에게 저항하는 운동이다. 대표 사례가 암태도 소작쟁의다. 소설 '암태도 소작쟁의(1969·박순동)와 '암태도(1981·송기숙)'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유명하지만 세부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본보는 이와관련 신안 농민항쟁 관련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암태도 소작쟁의의 시기는 기존 소작료 불납동맹이 시작되는 1923년 8월부터 지주와 합의가 이뤄지는 1924년 8월까지로 인식했다. 그러나 '암태소작인회'가 처음 결성되는 1923년 12월 4일부터 단체 명칭이 '암태농민조합'으로 변경하는 1926년 1월 28일까지로 폭넓게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1924년 8월 지주 측과 소작료율을 낮추는 합의가 성립됐지만 이후 지주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작인회를 분열시키려는 공작에 맞서 지속적인 소작인회의 활동이 전개됐다. 때문에 최소한 소작인회가 결성되고 단체명칭이 변경되는 시기까지를 소작쟁의 기간으로 보아야한다.
●5단계로 구성된 전개양상
전개과정은 크게 5단계 구분된다. 1단계는 암태소작인회의 창립(23년12월4일)과 소작료 불납동맹(24년3월21일) 실행 시기다. 쟁의 주 대상은 암태도 대지주 문재철 일가였다. 다른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분위기 였으나 문지주는 강력 거부했다. 이후 암태도 소작쟁의는 소작인회와 문지주의 대립 구도로 흘러간다.
2단계는 문재철 부친인 문태현 지주의 송덕비 파괴와 관련, 갈등이 심화되는 1924년 시기다. 비 파괴와 관련된 오해로 지주 측에서 소작인회 간부들을 폭행했고 이후 문지주 측에서 소작료율 인하 요청을 거절하자 소작인들이 실제로 송덕비를 파괴했다. 이로 인해 소작회 간부 13인이 구속됐으며 소작인회는 면민대회를 개최해 간부 석방 운동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단순히 소작인회의 문제가 아니라 암태도 주민 전체의 문제로 확대됐다.
3단계는 구속된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한 암태도 주민들의 단체 투쟁과 지주와의 협상체결까지의 시기다. 주민들은 단결해 두 차례에 걸쳐 바다 건너 목포 원정투쟁을 전개했다. 참여 인원이 최대 600명이었으며 법원 앞에서 굶어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 투쟁했다. 당시 신문에는 이를 '아사동맹(餓死同盟)'이라 표현했다. 사건 확대를 염려한 일제 경찰 측에서 문지주에게 화해를 종용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결국 1924년 8월30일 소작율 인하를 내용으로 하는 화해가 성립됐다.
4단계는 소작료율을 4할로 낮추는 협의 내용을 문지주 측에서 실천하지 않자 발생하는 또 다른 갈등의 시기다. 오히려 '암태지주소작상조회'를 결성해 소작인들의 분열을 유도하고 암태도와 목포를 오가는 선박 운영권(문재철 소유 남일운수 취급점)을 암태청년회에서 자신들의 측근으로 구성된 암태교육협회로 옮겨 버렸다.
이에 소작인회는 1925년 1월4일 총회를 통해 박복영을 소작인회의 새 대표로 선임해 체제를 정비했다. 이 무렵 구속됐던 소작인회 간부들이 출소하자 환영식이 열리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됐다.
5단계는 소작율 인하요구에서 시작된 문제가 지역 교육문제, 선박운영 문제 등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생기는 갈등 심화 시기다. 소작인회를 지원했던 암태청년회는 문재철에 맞서 다도운수주식회사 설립 운동, 남녀강습소 운영 등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소작인회 회원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문지주 측 사람들에 의해 습격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25년 2월 교육기금 모금을 강권한다는 이유로 일부 회원들이 또다시 구속됐다. 소작인회는 1925년 소작율 감정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 했으며 반대하는 문지주에 대항해 불납동맹을 실시했다. 1926년 1월 기존 소작인회가 암태농민조합으로 바뀌면서 농민문제 전반으로 관심사가 확대돼 갔다.
●서태석·박복영 등 소작쟁의 주도
암태도 소작쟁의에 참여한 숫자를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창립시 소작인회에 회원 숫자만 529명이었고 '아사동맹'에 참여한 인원은 600명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근거로 참여 규모는 600여 명으로 봐도 무방하다. 각종 기록을 통해 이름이 확인되는 명단은 총 44명이다.
소작쟁의를 주도한 인물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살펴볼 수 있다. 소작인회 회장, 총회 의장, 쟁의과정 구속자, 아사동맹 주도자가 이에 해당한다. 암태소작인회의 회장을 맡은 대표 인물은 서창석과 박복영이었다.
서창석이 창립부터 소작료불납동맹과 협상시기를 이끌었고 박복영은 1925년 1월 문지주 측에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이에 맞서 새 대표로 추대됐다. 흔히 서태석이 암태도 소작인회의 회장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서태석은 공식적으로 회장을 맡은 적이 없다. 소작인은 아니었지만 농민들의 단결과 투쟁을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대표 지도자 역할을 했다. 서태석은 소작인회 총회를 진행하는 의장 역할을 담당했다. 그 외 서동오·서동수·김상규·김정순 등 총회의 의장 역할을 한 기록이 있다.
●19명의 구속자 옥고 치러
암태도 소작쟁의 과정에서 일제 경찰은 총 4차례에 걸쳐 소작인회의 간부를 구속했다. 판결문을 통해 확인되는 인물은 21명이다. 1924년 4월10일 구속 된 서태석은 징역 2년, 1924년 4월13일 구속된 회장 서창석은 1년, 김연태·손학진 8개월, 김문철·김운재·박병완·박용산·박응언·박필선·박홍언·서동수·서민석은 8개월(집행유예 2년), 1924년 7월 13일 구속된 서광호·윤두석은 벌금형(실제 45일 수감생활), 1925년 2월 13일에 구속된 김세중·박응언·손학진은 8개월, 김정순·박금담·이봉오는 6개월형을 받았다. 구속자 21명 중 손학진과 박응언이 중복됐으니 암태소작쟁의로 감옥에 간 사람 중 확인되는 인물은 총19명이다. 이들이 암태소작인회의 임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며 실질적인 주도자들이다.
●고백화, 아사동맹 이끈 여성운동가
구속자는 아니지만 암태소작쟁의 주도자로 볼 수 있는 이들은 구속된 간부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바다 건너 목포 법원 앞에서 굶어주기를 각오한 단체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김용학과 고백화가 주도자다. 주목되는 인물은 고백화다. 그는 소작쟁의 이전부터 암태도에 여성 사립학교를 만들었던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암태도 부인회의 대표였다.
1924년 당시 만68세 고령이었지만 적극적으로 투쟁에 임했다. 농민들을 단합시키기 위한 연설자로 자주 등장했다. 아사동맹 과정에서 일본인 검사와 판사를 면담했고 구속자 석방을 항변했다. 1920년대 시대상에서 여성이 지역민들의 대변인으로 사회운동에 앞장선 사례로 주목되는 인물이다.
암태도 소작쟁의 전개과정과 주도 인물의 면모를 살펴봤다. 다음은 섬 농민들이 전개한 쟁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지, 암태도 사례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뭔지 최근 연구성과를 토대로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