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탄 생산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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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번개탄 생산 금지
박성원 편집국장
  • 입력 : 2023. 03.01(수) 14:37
박성원 국장
20여년 전 경찰서 출입기자 때의 일이다. 광주의 한 모텔에서 20대 여대생이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으나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경찰에 신고하고 병원 치료를 받았다. 여대생이 회복되길 바랐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안타까운 사망 소식을 접했다. 신속한 응급처치를 받았음에도 여대생이 숨진 이유는 바로 고독성 제초제 ‘그라목손’ 때문이었다. 이 농약은 저렴한 가격에 뛰어난 제초효과를 가졌지만, 고독성의 파라콰트 성분이 함유돼 사람이 마셨을 경우 폐·신장 등 각종 장기를 섬유화시켜 빠른 시간 안에 사망케 한다. 2010년에만 3206명이 그라목손 탓에 숨지는 등 자살 수단으로 악용돼 ‘죽음의 농약’으로 불렸다. 정부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2012년 그라목손을 포함한 고독성 농약 생산을 금지시켰다. 그라목손이 퇴출된 뒤 농약 중독 자살 사망자는 크게 줄었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자살예방 대책으로 산화형 착화제가 사용된 번개탄 생산을 금지하겠다고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자살을 막을 근본적 문제는 외면한 채 자살 수단만 규제하는 것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한강 투신을 막기 위해 한강 다리도 없애라’,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 차를 모두 없애라’ 등 조롱 섞인 반응이 대다수다. 복지부는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자살 수단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충동적인 자살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에 번개탄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실제 번개탄 자살로 골머리를 앓던 홍콩에서는 번개탄을 진열대에서 치우고 손님이 요구할 때만 판매하고, 구입자 연락처를 기록하게 해 자살률을 감소시켰다. 전문가들은 농약 ‘그라목손’ 퇴출 사례를 들며 자살수단의 치명성을 낮추는 정책도 일정 정도 효과가 있다고 평가한다.

‘번개탄 생산 금지’를 둘러싼 찬반 공방은 불필요한 소모전이라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자살을 막기 위한 사회 안전망 강화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자살은 개인만의 문제를 넘어 가족, 주변인, 사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최근 제주에서 번개탄과 소주를 주문한 손님의 안색을 수상히 여긴 퀵서비스 배달원의 신고로 소중한 생명을 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살 예방의 첫걸음은 ‘따뜻한 관심’이다. 주위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문적인 치료 또는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