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광장·이기언> 학교폭력 예방은 인간관계 회복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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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광장·이기언> 학교폭력 예방은 인간관계 회복부터
이기언 광주광역시교육연구정보원 연구원·교육학박사
  • 입력 : 2023. 03.30(목) 13:14
이기언 연구원
최근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공개된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연일 화제다. 작년에 공개되었던 ‘파트 1’에선 주인공이 당했던 학교폭력의 잔인함이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면, 얼마전 공개된 ‘파트 2’는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준비한 복수를 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통쾌함과 권선징악의 결말이 많은 이의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파트 2가 공개되는 날 몰아보기를 하였다. 드라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메시지는 학교폭력 피해자인 주인공이 지금까지 견디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장면이었다. 부모에게도 이용당하고 학교폭력을 당한 학교에서도 외면당했던 주인공이 자퇴하고 입사한 공장에서 만난 동생, 아르바이트를 하던 목욕탕에서 만난 아주머니, 조력자인 이모님,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준 형사, 그리고 복수를 위해 망나니 역할을 자처하며 사랑을 나눠준 의사 등을 떠올리며 “옆에 있었던 좋은 어른들 덕분에 더 망가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다”는 대사였다.

이 드라마에 많은 이들이 열광을 한 것은 현실에서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고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다뤘기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 경찰 고위직에 도전했던 검사 출신 변호사 자녀가 학교폭력 가해자임에도, 반성하지 않고 ‘법(法)’을 교묘히 이용해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산된 국민적 공분도 ‘더 글로리’의 결말에 환호하게 했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가 그러하듯 힘을 가진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피해사실의 공론화를 어렵게 한다.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떠넘기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한다.

더욱 큰 문제는 학교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 만의 문제로 여기고 못 본 척 하는 것이다. 여기엔 학교 내 교우관계 친밀도의 변화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광주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에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실시한 광주교육종합실태조사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응답이 100점 환산 점수 기준 2018년 79.5점, 2020년 78.0점, 2022년 77.2점으로 낮아지는 추이를 보였다. 반면 ‘친구들과 잘 어울려지낸다’는 응답은 2018년 74.5점, 2020년 80.8점, 2022년 82.4점으로 높아졌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증가하고 있으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만한 긴밀한 관계의 친구는 줄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친구 사이지만 너무 가깝거나 사생활을 공유하는 정도까지의 친밀함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요즘 학생들의 개인주의와 목적지향적인 관계 형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교우관계는 학교나 직장에서 누군가가 따돌림을 당하거나 다양한 폭력에 힘들어하더라도 ‘저 정도는 심각한 것이 아니니 괜찮겠지’, ‘내가 당한 것이 아니니 개입하지 말자’,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관여하겠지’라는 책임 전가 등의 행동으로 나타나기 쉽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에미 워너 교수는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40년에 걸친 종단연구를 실시하였다. 열악한 가정 환경과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성장한 아이들의 삶에 관한 연구로 1955년에 태어난 모든 신생아를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카우아이 섬은 하와이 군도에 속해있지만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은 오지이다. 섬 주민들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 혹은 정신질환자였다.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청소년 비행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에미 워너는 그 중 ‘고위험군’에 속한 201명을 추려내어 성장 과정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사회부적응자의 비율은 65%였고, 가정 환경, 부모와의 관계, 경제적인 상황, 교우 관계 등 모든 것이 열악했던 아이들 중 35% 정도는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했다. 이 연구의 핵심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제대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은 ‘인간관계’라는 결과였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자신의 입장을 무조건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의 유무가 카우아이 섬 출신 아이의 성장 모습을 다르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긍정적이고 자신감을 갖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한 35%는 ‘자신에게 힘을 주는’ 인간관계를 갖고 있었던 반면, 자신이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65%는 일탈과 비행을 일삼는 사람으로 키워졌다.

학교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지금,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모, 가족, 친구 등과의 관계맺음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힘든 시기를 함께 견딜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관계, 이를 위해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공감해줄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학교폭력의 근본적인 예방책은 인간관계의 회복이다.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친구, 선생님과 긍정적 관계를 형성해가는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