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율려(律呂)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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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율려(律呂)란 무엇인가
344. 용당리 흰그늘
“김지하의 흰그늘이 그의 고향 목포 갱번에 떠오른 수많은 주검들의 끔직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것이 훗날 율려와 흰그늘 담론으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이 내 주장의 요지다. ”
  • 입력 : 2023. 04.27(목) 15:07
김지하가 그린 난초. 유홍준 소장
지난해 8월30일 목포문학관에서 진행된 김지하 추모문화제. 이윤선
작년 김지하 작고 후, 본지면에 흰그늘의 내력을 썼다(2022. 8. 19). 오늘 다시 소환한다. 먼저 썼던 글을 해체하여 보완한다. 김지하의 흰그늘은 1999년 「율려란 무엇인가」에서 등장한다. 그 이전부터 언급은 있었겠지만, 개념으로 확정한 것은 이때 즈음이다. “중심음 발표하기 이틀 전인데, ‘흰그늘’이라는 말이 자꾸 아른거려요. 이게 뭘까? 그늘의 이중성의 안에서부터 생성되는 무궁 신령한 아름다움, 문채, 무늬야!” 김지하의 『율려란 무엇인가」(1999)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심음’이 이후 내내 김지하가 주장했던 율려(律呂)의 협종(夾鍾)이다. 착상 때부터 ‘흰 그늘’과 ‘흰그늘’을 구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의 저술들을 보면 대부분 ‘흰 그늘’로 떼어 썼다. 하지만 나는 붙여쓰기로 한다. 음양론의 ‘음양’을 붙여 쓰듯 한 단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흰그늘의 착상을 유도한 것은 율려(律呂) 담론이었다. 1187년 송나라 채원정의 <율려신서>와 1493년 성현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악학궤범>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음악분석뿐만 아니라 도량형 분석 등 산수역학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율려신서>는 남송의 채원정이 1187년경 완성한 대표적 음악이론서로, <율려본원>과 <율려증변>의 전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세종 원년 1419년에 전래되었다. 이후 세종의 아악 정비에 주요 이론이 되는 등 조선시대 악정의 기준이 되었다. <악학궤범>은 1493년(성종 24년)에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 제조 유자광 등이 왕명을 받아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편찬한 악서이자 예술서다.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와 악보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은 것들도 모두 엉성했기 때문에 그것을 수교(수교, 다른 것과 대조하여 교정함)하기 위하여 펴냈다. 지금까지 우리 국악의 교범처럼 여기고 있는 책이다. 율려의 본고향 중국의 경우 시대마다 수리로 계산하거나 음양오행사상에 연결하거나, 십이월령사상, 월력, 주역 등에 대입해 풀기도 했다. 율려를 산출하는 방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좁히면 <율려>는 황제의 음(音)을 정하는 수리이론이었으며 천체의 이치를 12궁도로 풀어낸 사상이었다. 세상을 음악으로 다스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만 상고할 게 있다. 다산 정약용의 「악서고존」이다. 김세종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것이 오히려 흰그늘 담론의 충정을 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다산은 12권 4책의 방대한 분량을 할애해 중국의 악률을 비판하고, 하늘의 율(律)수 3수와 땅의 여(呂)수 2수를 대별하여 ‘삼기육평(三紀六平)’이라는 이론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탐구하는 이 적어 외로운 경서로만 남았다. 그래서다. 황종(黃鍾)과 협종(夾鍾)의 자리바꿈이나 중심음 개념의 전복 등으로 김지하가 말하고자 했던 후천개벽의 의미망을 포섭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내가 과문하여 김지하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생각한다. 김지하의 <율려> 담론은 흰그늘이라는 시적 언명을 산출한 경로와 성과로 충분하다.



흰그늘의 착상에서 탄생까지



다시 김지하의 고백을 인용한다. “내가 5년 만에 시를 7편 썼는데, 제목이 ‘흰 그늘의 길’입니다. 내년 초쯤에 발표될 거예요. 여러분이 이 운동을 시작하면 상당한 호응이 있을 거예요. 내가 썩 좋아하는 하버드 출신의 정치학 교수가 있어요. 이 친구가 10년 만에 자기 친구들 만나러 하버드에 갔더니 같은 정치학 하는 친구들의 첫 마디가 뭐였는지 아세요. 야 너 또 카피하러 왔냐?” 서양을 베끼는 게 아닌 우리 미학 하기의 실천 방식으로 이 용어를 쓴다는 뜻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흰그늘의 길 3권」(2001)에는 또 이렇게 서술한다. “내가 생각해도 별 재미가 없는 강연이었다. 아직 ‘그늘론’이나 ‘흰 그늘의 미학’에는 못 미쳤으나, ‘신명’과 ‘활동하는 무(無)’에 관해 강조했던 것을 기억한다.” 19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학강연 회고 내용이다. 이때까지는 ‘흰 그늘’뿐 아니라, ‘그늘’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착상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율려란 무엇인가」(1999)에서 그의 고백이 이어진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며칠 전 잠이 반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이상한 체험을 했습니다. 메시지를 받았다고 할까요? 계속해서 눈 안에 ‘흰 그늘’이라는 글자가 이상한 형상으로 클로즈업되는 것이었습니다. 한자로도 나오고 그림 형상의 상징으로도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율려운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늘’이 무엇입니까? 그늘이란 것을 판소리, 산조와 정사와 무용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애당초 초보적인 연구자들은 그늘을 ‘한(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서편제>에서 특히 그늘을 매우 중시하는데, 저 사람 소리에 ‘그늘이 있다’, ‘그늘이 없다’가 미적 판단의 갈림길입니다. 광주나 전주에 가면 귀명창이 많은데 그늘을 중요시해서 창하는 소리를 듣고 저 사람 소리엔 그늘이 없다고 이야기하면 끝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생에 있어서 신산고초를 겪어야 그늘이 생기고 수련하는 사람도 피하는 독공을 해야 그늘이 생깁니다. ‘한’을 풀지 않고 삭히는 ‘시김새’가 그늘을 형성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지적이 나온다. 하나는 흰그늘이 미적 판단의 준거가 된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흰그늘이 판소리나 민요 창의 시김새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난 칼럼에서 곰곰이 밝혀두었듯이 흰그늘 담론의 내력은 매우 웅숭깊다. 주몽탄생설화 등 우리 고대의 이야기하기 방식으로부터 매우 견고한 줄기로 성장하여 김지하의 언명으로 재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은 김지하의 이런 사상사적 궤적이 다름 아닌 그의 고향 목포와 할아버지의 고향 암태도 등지의 이른바 ‘갱번’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알기로 이를 언급한 이는 김선태 시인이다. ?김지하의 초기시와 생명사상과의 연관성-목포 관련 시편을 중심으로?(현대문학이론연구, 2013)에 비교적 자세하게 분석되어 있다. 나는 이 전거에 주목해 <흰그늘의 두 출처& 나의 재생론 ‘다시살기’ 다듬기>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 김지하의 흰그늘이 그의 고향 목포 갱번에 떠오른 수많은 주검들의 끔직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것이 훗날 율려와 흰그늘 담론으로 재구성되었다는 것이 내 주장의 요지다. 흰그늘이 포착된 두 가지 출처를 나름대로 밝혀내고 내가 고안한 ‘다시살기(재생론)’를 덧붙인다. 김지하 서거 1주기 추모학술대회, 오는 5월 3일 대학로 예술회관에서 생명문화포럼 주최로 열린다. 상극의 삶을 강요받아 살았으되 상생의 삶을 지향하였던 그의 1주기에 옷깃 여며 추모의 마음을 남긴다.



남도인문학팁

용당리에서(김지하 초기 시)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출렁이는 가래에 묻어올까, 묻어오는/ 소금기 바람 속을/ 돌 속에서 흐느적거리고 부두에서/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 있다/ 그러나 나의 죽음/ 죽음은 어디에/ 무슨 일일까 신문지 속을 바람이 기어가고/ 포래포래마다 반짝이는 내 죽음의/ 흉흉한 남쪽의 손금들 수군거리고/ 해가 침몰하는 가래의 바다 저 끝에서/ 단 한 번/ 짤막한 기침 소리 단 한 번/ 그러나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침묵의 손수건에 묻어올까/ 난파와 기나긴 노동의 부두에서 가마니 속에/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작은 손이 들리고/ 물 위에서 작고 흰 손이 자꾸만/ 나를 부르고/ ─「용당리에서」전문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