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취재수첩> 승자가 패자가 되기까지, 딱 ‘열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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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전남일보] 취재수첩> 승자가 패자가 되기까지, 딱 ‘열흘’
한규빈 문화체육부 기자
  • 입력 : 2023. 05.09(화) 13:31
한규빈 기자
2023년 4월 17일. 프로배구 여자부의 막내 구단인 페퍼저축은행 AI페퍼스 배구단이 올해 FA 시장의 승자로 떠올랐다. ‘배구 여제’ 김연경을 비롯해 자유계약 선수 ‘빅3’로 꼽혔던 ‘클러치 박’ 박정아와 ‘배구 천재’ 배유나 중 한 명을 품은 것.

AI페퍼스는 국가대표 아웃사이드 히터 박정아(전 한국도로공사)에 3년간 최고액을 안겼고 채선아를 영입 후 집토끼인 오지영과 이한비도 단속해 내며 순식간에 봄 배구 전력을 갖췄다. 사실상의 ‘윈 나우’를 선언한 것이다.

또 아시아쿼터 드래프트에서 필리핀과 미국 이중 국적의 미들블로커 엠제이 필립스를 지명하며 퍼즐 한 조각을 더 맞췄다. 하혜진과 염어르헝, 최가은, 서채원까지 미들블로커 4명이 모두 부상으로 신음하는 가운데 확실한 주전을 가지면서 창단 첫 봄 배구를 위한 마지막 퍼즐로 외국인 선수 지명만 남겨놓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 긴장감과 기대감은 딱 열흘 뒤 가라앉았다. 지난달 26일 한국도로공사의 보상 선수 지명이 발표되면서다. 한국도로공사는 이날 이고은의 지명을 알리며 주전 선수 이탈로 인한 전력 누수 최소화라는 이유를 밝혔으나 “즉시 전력감이 이고은밖에 없어 고민의 여지조차 없었다”는 입장도 함께 알려졌다.

주전 세터를 허무하게 잃은 것이 알려지자 팬심이 들끓었다. 즉시 전력을 영입해놓고 즉시 전력을 내준 아마추어 행정에 나타난 당연한 분노였다. 보호선수 명단은 통상적으로 즉시 전력 선수들을 묶는다. 즉시 전력감이 풀릴 경우 그 선수를 지명해 전력으로 활용하거나 트레이드 카드로 내놓기 때문이다.

보호선수로는 6명을 묶을 수 있는데 FA 계약자 4명을 감안하면 AI페퍼스에 주어진 카드는 사실상 2장이었다. 그 2장 중 1장이 부동의 주전인 이고은에 사용될 것이라는 예상은 당연했다.

하지만 AI페퍼스는 이고은을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하는 악수를 뒀다. 그 이유로는 이고은이 1년 전 FA로 한국도로공사에서 이적해왔고, 몸값이 많이 뛰었기 때문에 지명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는 것을 들었다. 트레이드 활용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착오적 발상이었다.

그리고 엿새 후인 지난 2일에는 더 큰 충격을 안겼다. 이고은을 트레이드로 다시 영입하면서 한국도로공사에 최가은과 함께 2023-2024시즌 신인 1라운드 지명권을 양도한 것.

약 2주 만에 주전 미들블로커와 팀의 미래를 모두 잃은 셈이다. AI페퍼스는 이번 신인 드래프트에서 최대어로 꼽히는 김세빈(한봄고)에 대한 최고 확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트레이드로 그 확률을 한국도로공사가 가져갔고, 한국을 넘어 아시아 고교생 무대를 평정한 선수를 구단 스스로 포기했다.

이제 AI페퍼스에 대한 팬 ‘솔트’들의 기대감은 완전히 메말랐다. 현재와 미래를 모두 스스로 포기한 구단의 선택에 대한 당연한 결과다. 구단에 포기당한 선수들과 그들을 응원하는 팬들의 마음을 회복시킬 방법은 이제부터 강구해야 한다. 부디 호남의 유일한 프로배구단 AI페퍼스가 이 난관을 헤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