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환 논설실장. |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1992년 5월, 당시 국립광주박물관 조현종 학예사가 공동 독무덤을 다시 찾았다. 국도 1호선을 직선화하는 공사가 한창이던 때였다. 독무덤이 나왔다면 분명 다른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추론은 맞아 떨어졌다. 대충 둘러본 현장에서 그는 볍씨와 각종 토기편을 찾아냈다. 정식발굴이 시작된 후에도 그곳에서는 토기와 머리빗 등 어마어마한 양의 유물이 쏟아졌다. 수천 년 전, 선사시대 광주의 재발견이었다.
신창동 유적은 초기 철기시대 말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복합농경유적지다. 우리나라 최초와 최고, 최대를 자랑하는 유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당장 이곳에서는 벼껍질 압착층 등 세계 최대의 벼 유적을 비롯해 칠기와 현악기, 신발을 만드는 신발 골, 수레바퀴 등 선사시대 유적 2만여 점이 발굴됐다. 베틀 부속구인 바디와 실감개, 마직물 조각도 대마 종자와 함께 출토됐다. 당시 대마를 재배하고 삼베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확실한 증거들이다. 비단조각과 각종 해산물도 발견됐다. 양잠이 성행하고 해안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의미다.
호남고속도로 동광주IC~광산IC 확장공사로 신창동 유적지가 훼손될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마한의 역사를 담은 신창동 유적지는 지금도 전체의 70%가 발굴되지 않는 미완의 영역이다. ‘국보급에 버금간다’는 유적도 다량 출토됐다. 신창동 유적을 처음 발굴했던 김원용 교수는 자서전 ‘나의 인생 나의 학문’에서 1971년 하룻밤에 발굴을 끝냈던 무령왕릉을 ‘생애 가장 수치스런 발굴’이라고 했다. 학자로서 외부 여건에 굴복했다는 회한이다.발굴과정부터 출토된 유물까지 신창동도 무령왕릉과 비슷하다. 갖가지 이유로 ‘개발’을 강요하고, 온갖 핑계로 보존을 방해하는 이들이 신창동을 또 다시 ‘수치스러운 발굴’로 내몰고 있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