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52> 허물벗기-사적이고 젠더화 된 삶과 예술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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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52> 허물벗기-사적이고 젠더화 된 삶과 예술의 해방
●이선 이강하미술관 학예실장
“우리의 방은 껍데기, 피부입니다. 사회로 부터 억압된 것, 방치된 것, 낭비된 것, 잃어버린 것, 황량한 것, 잊혀 진 것, 박해받은 것, 상처 받은 것 등을 하나씩 껍질을 벗기고 버리십시오.”
  • 입력 : 2024. 04.07(일) 14:28
하이디 부허 작 ‘문 스키닝(skinning) 작업하는 작가의 모습을 담은 영상’.
‘네오 아방가르드(Neo Avant-garde)’는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아방가르드적인 고안들, 즉 콜라쥬와 앗상블라쥬, 레디메이드와 그리드, 모노크롬 회화와 구성 조각 같은 것들을 재활용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북미와 서유럽 미술가들의 자유와 상상력을 표현했던 것들을 묶어서 20세기 후반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미술사적 후속이자 저항으로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서유럽의 반미학적 미술을 가르킨다. 이후 대지미술, 미니멀리즘, 건축적이고 장소 특정적 미술, 퍼포먼스, 해프닝, 팝-아트 장르가 쏟아지던 1960~1980년대를 다양하게 포괄하고 있기도 하다.

그 시기 서구 부르주아 남성 중심의 사회적 질서가 요구되는 정형적 미술 규범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 전위예술을 펼쳤던 스위스 출신 네오 아방가르드 예술가 하이디 부허(Heidi Bucher, 1982~1993)를 소개한다. 작가는 살아생전 현대 미술계에서 존재감이 약한 아웃사이더 작가였지만, 작품세계가 2004년 스위스 취리히 미그로스현대미술관 회고전을 시작으로 본격 재조명받기 시작하여, 2013년 파리 스위스 문화원과 201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 전시, 2021년 독일 뮌헨 헤우스데어쿤스트의 대규모 회고전 등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작은 섬 란사로테에서 보내며 작업한 문 ‘스키닝(skinning)’ 작품들과 행위들은 작년 아시아 최초 하이디 부허를 재조명하는 아트선재센터 <공간은 피막, 피부(Heidi Bucher: Spaces are Shells, are Skins)> 회고 전시를 통해 면밀히 알 수 있었다. 여성 인권을 주제로 한 작품이 주로 선보이며 그가 마주한 여성의 일생적 삶과 죽음의 경계를 고민한 작품들과 대표적인 문 ‘스키닝’ 작업을 선보이며 국내에 많은 현대 미술애호가들의 관심과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이디 부허는 남성적 유럽 건축 요소의 물리적 구조와 여성적 인체의 유사성을 밝히는 라텍스 캐스팅(본을 뜨는) 작업이 대표적이며 그의 작업은 주물을 뜰 구조면에 거즈 천을 덮고 액체형의 라텍스를 발라 벗겨내는 ‘스키닝’ 작업으로 은유된다. 마치 낡고 여린 ‘피부막’을 벗겨 내고 오랜 장소를 뒤로 하는 작가만의 사적 ‘허물벗기’ 과정들이다. 이 행위는 동시에 특정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 개인적인 역사와 시대적 문화사를 개념하고 있다.

“우리의 방은 껍데기, 피부입니다. 사회로 부터 억압된 것, 방치된 것, 낭비된 것, 잃어버린 것, 가라앉은 것, 평평해진 것, 황량한 것, 거꾸로 된 것, 희석 된 것, 잊혀 진 것, 박해받은 것, 상처 받은 것 등을 하나씩 껍질을 벗기고 버리십시오.” -Heidi Bucher

하이디 부허 작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과 그의 요양원 입구를 스키닝한 ‘작은 유리 입구’ 크로이츠링겐 벨뷰 요양원.
작가는 라텍스가 건조되면 마치 살갗 같은 색상, 질감 및 유연성을 띠게 된다는 점을 이용해 원래 대상의 형태 및 질감을 보존한다. 권위적인 아버지의 서재 의자를 스키닝 한 ‘Herrenzimmer’은 스위스의 젠더 불평등 시대적 상황을 상징한 작품이다. (스위스는 1971년이 돼서야 여성이 참정권을 얻을 정도로 남녀를 향한 사회적 지위와 잣대는 달랐다. ‘Herrenzimmer’는 한국어로 ‘신사들의 서재’다.) 부허는 남편 칼 부허와 이혼 후, 미국에서 스위스로 돌아와 홀로 자식들을 키우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집중하며 작업 할 수 있었다. “남자들의 집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던 여자들” 즉 자신을 포함해 가정 내에 박제된 삶을 견뎌야 했던 당시 여성들을 상징적으로 기념하며 자신만의 작업을 이어나갔다.

하이디 부허는 1980년대 초반까지 사적이고 ,젠더화 된 공간에 집중했고, 그 이후부터는 란사로테(Lanzarote,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에 위치한 섬)에서 점차 많은 시간을 보내며 호텔과 아트리서치센터 등 공적인 공간에 관심을 가졌다. (란사로테는 최근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20세기에는 많은 예술인에게 영감을 주는 곳으로 유명했다.) 건조한 화산암 풍경 위에 펼쳐진 파란색과 하얀색 건축물은 작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선사했다. 하이디 부허가 문 스키닝 작업을 한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유가족들의 말을 빌리면, 작가가 암 투병을 하면서 마주하게 될 죽음과 그 이후 삶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가지면서 기존 작업에서 탈바꿈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이디 부허 작 ‘신사들의 서재’.
작가는 란사로테의 시골집에 ‘팔라시오 이코(Puerta del Palacio Ico)’라는 이름을 붙여 수도와 전기가 단절되는 상황에서도 그곳에서 생활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부허는 건물의 각종 문에 특히 이끌렸는데 팔라시오 이코는 스키닝 작업의 주요 대상이 됐다. 녹청이 생긴 양쪽 문 표면에는 내부 목재 질감이 간헐적으로 노출됐고 산화로 인한 다양한 음영 청록색은 신비로운 빛깔을 띠었다. 부허의 ‘무제(필라시오 이코의 문)’(1986년)은 뚜렷한 녹청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나무 무늬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 라텍스가 굳을 때 녹이 슬어 부서진 잔해와 페인트가 라텍스에 달라붙은 흔적들까지 담고 있다. 그 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암갈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작품은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시간’이 같이 흐름을 공존한다.

하이디 부허 작 무제.
작가의 예술세계는 당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건물의 허물(여성의 피부)을 벗겨내는 조각적인 반복 행위를 통해 결국 ‘해방’이라는 주제를 표현해내고 있다. 이는 21세기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공간을 넘어 특정한 공간 안에서 인간의 몸과 존재 양식을 탐구하는 독립적 지각 경험을 상상하도록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