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死·삶)과 광주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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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제주 4·3(死·삶)과 광주 5·18
박간재 취재2부 선임부장
  • 입력 : 2024. 04.08(월) 13:36
박간재 취재2부 선임부장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대회가 열렸다. 군중들이 가두시위에 나섰고 기마경찰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다쳤다. 그대로 두고 지나가는 기마경찰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관덕정 부근에 있던 무장경찰들이 총을 난사했다. 주민 6명이 사망하는 등 제주4·3 도화선인 ‘3·1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미 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했다.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며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았다.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되던 1954년 9월21일까지 7년7개월 동안 제주도민 2만5000명~3만명이 희생됐다.

마음의 빚으로 남아 늘 죄스럽던 차 지난달 말 광주전남·북기자협회 소속 기자들과 제주 4·3 세미나를 다녀왔다. 4·3평화기념관엔 방문객들로 붐볐다. 코너 해설사들의 열정적인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행불인 묘역앞이 왁자지껄하다. ‘행불인표석 조화꽂이 봉사활동’ 온 대학생들이다. 눕혀진 비석에 새겨진 ‘감옥에서 온 편지’는 눈물 없이는 읽을수가 없다. “몸과 기력에 영양 있는 약, 비타민을 부쳐주길…' “매형에게 부탁하였으니 소와 말을 잘 관리하여 주기를 부탁합니다.”(감옥에서 온 편지 중). ‘섬하나가 몬딱 감옥이었주마씸/섬하나가 몬딱 죽음이었주마씸’(문충성의 시 ‘섬 하나’ 중). 그들의 절절한 심정이 가슴을 짓누른다.

유일한 조형물 ‘변병생 모녀 조각상’으로 향했다. 젖먹이 딸을 안고 산에서 내려오다 이 근처에서 토벌대 총을 맞고 눈밭에 쓰러진 봉개동 모녀를 형상화 한 작품이다. 아이 울음소리에 은신처가 발각된다며 피난민들이 질책하자 죽기를 각오하고 산에서 내려오다 변을 당했다고 한다. 문득 눈앞이 흐릿해진다. 슬며시 뒤돌아 흐르는 눈물을 제주 바닷바람으로 말린 뒤 다시 조천읍 북촌마을로 향했다. 500여명이 하루 한 날 몰살당한 곳 북촌초등학교. 당시 악몽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초등생들의 재잘거림이 정겹다. 근처 너븐숭이기념관엔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작품이 보인다. 총맞아 죽은 줄도 모르고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다. 분노감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북촌마을 비극을 배경으로 쓴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 기념비도 있다. 대학때 어렵게 구해 읽었던 책 속 장소를 찾은 기분은 감동 그 자체였다. 소설가 임철우는 장편 ‘봄날’에서 광주5·18을 ‘결코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열흘’이라고 표현했다. 제주 역시 ‘결코 아무도 찾지 않는 7년7개월’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 였던 것.

오는 길에 국립광주5·18민주묘지가 떠올랐다. 구묘역과 신묘역, 기념탑과 전시관, 옛 도청광장, 광주·전남 50여곳 사적지…. 그외 뭐가 있었나. 4·3유족회 관계자는 “그래도 광주 5·18은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 됐잖아요”라고 했지만 광주는 제주 4·3보다 뭔가 허전하고 부족해 보인다. 한 달 뒤 5·18이다. 엄숙함·비장함을 벗고 산자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5·18을 만들순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