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숭고한 자들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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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
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숭고한 자들의 기도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베르디, 음악극으로 불평등사회 알려
민중 봉기 ‘시칠리아 만종 사건’ 배경
사실적 묘사·완성도 높은 음악 ‘압권’
서곡 ‘신포니아’ 등 연주곡으로 각광
  • 입력 : 2025. 05.22(목) 09:15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공연 중 몽포르테 역의 바리톤 레오 누치. 출처 뉴욕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에 관하여 안나 카림 팜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은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감동적이면서도 끔찍한 이야기로 트라우마가 어떻게 세대를 넘어 계승되는지를 다룬, 역사적 사실을 아주 특별하게 다루었다”고 말했다. ‘소년이 온다’로 이제 당시 동양의 변방인 대한민국 5월 광주의 끔찍한 만행은 한강의 활자로 세계인이 공감하는 사건으로 주시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기억하며 민주화를 열망했던 광주가 낳은 시대 정신으로 이제 세계가 광주를 품고 광주가 세계에 고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인들은 과거 광주 정신의 근간이 되는 3·1운동의 효시였던 광주학생운동을 시작으로 광주를 공부하고 대한민국의 부흥을 주도하는 광주 정신의 근간을 살펴보고 있다.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공연장면. 출처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
이탈리아에도 한강 작가와 같은 이탈리아 민족에게 희망을 음악으로 북돋아 준 세계적인 작곡가가 있다. 그는 오페라의 왕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로 그가 다룬 수많은 작품은 외세에 핍박받던 당시 분열된 이탈리아를 하나로 만들고 시대의 오류를 생산하는 유럽의 권력자들과 당시의 불평등한 사회의 세태를 음악극으로 만들어 세상에 고하는 일을 하였다.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공연장면. 출처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
베르디가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표방하는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오페라 <나부코>의 성공 이후, 그의 3대 오페라로 불린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를 작곡하며 그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어 그의 역작으로 꼽히는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I vespri Siciliani, 1855>가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1282년 성당의 저녁기도 시간에 맞춰 시작된 봉기인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13세기 후반 시칠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공은 프랑스 영주 가문의 샤를 왕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시칠리아 인들은 프랑스의 샤를 왕의 동생 앙주 왕조의 강압적인 지배를 받게 되며 반감을 키워간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군인이 시칠리아의 수도 팔레르모의 유부녀를 추행하다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민중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성당의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맞춰 팔레르모 시민들이 프랑스인들을 습격하며 봉기는 시칠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지중해에 앙주 제국을 세우려던 카를로 1세의 야망은 이 사건으로 무너졌다. 봉기의 시작은 대상이 틀리지만 광주학생운동과 비슷했다. 그리고 이어져 전국으로 확산한 3·1운동을 통해 만방에 우리의 민족자존을 알리는 비폭력 운동과는 다른 양상의 전개로 진행됐지만, 독립을 갈망하고 억압에 항거하는 시대정신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공연장면. 출처 이탈리아 제죠 파르마 극장
베르디는 ‘제1회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파리 오페라 극장의 요청으로 스크리브(Augustin Eugene Scribe, 1791~1861)의 원작을 대본가 뒤베이레가 각색한 프랑스어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를 1855년 6월 13일에 올리게 된다. 엄청난 성공을 파리 초연에서 거둔 이 작품은 이후 파리 오페라 좌의 주요 레퍼토리로 10년간 62회나 성황리에 올려질 정도로 프랑스인들에게 각인된 작품이 되지만 프랑스인이 압제자로 등장해서 일부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듣기도 하였다. 이후 여러 번역가에 의해 이탈리아어로 스칼라 극장을 비롯해 여러 극장에서 <조반나 데 쿠츠만>, <시칠리아의 조반니>, <투렌나의 바틸데>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이탈리아 버전이 올려졌으며, 현재는 스칼라 극장판에 원제를 살려서 공연되고 있다.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에가 출연한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공연 모습. 출처 뉴욕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베르디는 지배 세력인 프랑스와 억압당하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대립 구도를 드러내기보다는 타인을 억압의 도구로 삼는 특권층과 다른 정치적 견해로 차별받는 사회의 현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이 작품에 담아내고 싶어 했다. 지금의 세태와 어찌 보면 비슷한 이런 갈등 요소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극 안에서 표출되는 국가와 민족 간의 대립도 볼 수 있으나 무엇보다 베르디가 그려낸 얽힌 인생의 고뇌와 갈등은 작품 전체에서 주요 음악 안에 깊이 묘사되어 관객에게 더욱 강력한 갈등의 서사로 감동을 준다. 또한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는 서곡과 주요 아리아는 독립된 연주곡으로도 각광을 받는 레퍼토리이다. 특히 작품 전반의 정서를 잘 표현한 ‘신포니아’로 불리는 서곡은 독립적인 관현악 작품으로 자주 연주된다.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의 스토리를 살펴보자면 엘레나와 아리고를 비롯한 시칠리아 인들은 힘을 모아 프랑스에 대한 봉기를 계획한다. 이때 베르디의 가혹한 운명의 서사가 등장하는데 프랑스 총독 몽포르테는 헤어진 여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아리고임을 알아채고 봉기의 중심에 있는 그를 불러 자신이 친아버지임을 밝힌 것이다. 조국애와 부정을 그리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리고는 엄청난 고뇌에 빠지게 되고 하지만 이를 무시한 채 몽포르테는 엘레나와 아리고의 결혼을 선포하며 화합을 꾀하려고 한다. 시칠리아 인들은 결혼식을 기회로 연회에 모인 프랑스인들을 일망타진하려 한다. 마침내 결혼식 종소리를 신호로 시칠리아 인들은 프랑스 세력을 습격하면서 오페라의 막이 내린다.

1846년 프란체스코 아예스의 작품 ‘시칠리아의 만종’. 출처 위키피디아
베르디가 오페라 작가로 데뷔해 초기 작품 제작에 열중하던 시절 이탈리아는 분열되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혼란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쓰인 <나부코>, <롬바르디아인>, <에르나니>, <레냐노 전투>는 이탈리아 독립이라는 그의 열망이 가득 담긴 작품이다.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작품들의 연장선상에서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역시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의 성공에 관하여 세간의 보수적인 호사가들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 평하였지만, 베르디는 이러한 혹평에도 굴하지 않고 작품 성공에 관하여 자신감을 내 비췄다고 전해진다. 베르디는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향한 열망과 더불어 시대가 안고 있는 부조리와 갈등에 관하여 등장인물의 사실적인 묘사와 수려하고도 완성도 높은 음악으로 이를 승화시켰다.

시칠리아의 만종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팔레르모 성령교회. 출처 위키피디아
오페라는 서양에서는 최고의 퍼포먼스로 고정 관객층 역시 견고하며, 과거에는 오페라가 사회의 문화 현상을 선도하며 시대가 말할지 못하는 오류와 불편함을 민중들에게 고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과거 신본주의 시대에는 오페라를 핍박하기도 하였으며, 권력자들은 이를 도구화하기 위해 각종 검열과 지원정책을 통해 사유화하거나 이를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쓰려는 시도를 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는 민중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 장르로 살아남아 현재까지 각 도시의 문화 척도로 시대정신을 담는 매개체로 아직도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이제 그의 고향 광주가 문학의 도시로 인권 민주의 도시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시대 광주의 세계화를 위한 열망을 위해 광주를 알고 광주를 담을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메이드 인 광주 오페라가 등장할 때가 됐다. 광주가 만들고 세계가 감동하는, 그날을 기다리며…. 광주시립오페라단 예술감독·문화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