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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번의 봄날이 다녀간 해였다. 구두통 들고 꼬꾸라져 죽었던 구두닦이의 피도, 나팔바지 멋지던 넝마주이의 두개골도, 남도땅 어느 억새 아래 진토되었을 시간,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누이, 아! 누군가의 사랑, 이승을 뜨지 못한 그 아무개들의 넋이 강산마저 무시로 변한 무대로 현현하였다. 두드리는 북소리는 마디마디 천지를 흔들었다. 격조 높은 선율들이 조우 해낸 무대의 여기저기 묵혀두었던 울음들이 백색 무희의 옷자락을 흔들어댔다. 그들의 몸짓은 꼬이고 뒤틀린 이 환장(換腸)할 세상에 토해내는 핏덩이 같은 것이었다....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2023.12.07 13:19달항아리와 귀얄찻그릇에 스민 고대신화 백자대호 즉 달항아리가 지닌 심미적 세계는 삼척동자라도 알 만큼 익히 알려져 있다. 국보로 지정되기도 하고 김환기 등의 거장들에 의해 자주 그려지기도 했다. 수많은 도공, 예술가들에 의해 빚어지기도 했다. 이 심심한 백자 항아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 나아가 한국미의 전형으로까지 대접받았다. 시대정신이 그리 만든 것이다. 하지만 백자의 출현 이후 그저 생활 도기의 하나로 치부했던 시절이 길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할 것이다. 법고창신의 행로에는 늘 부침이 있...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2023.11.30 14:48“단풍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까지 했던 프로스트의 시, 의 앞머리다. 대개 인생의 두 갈래 길 혹은 여러 갈래 진로를 결정하는 일에 비유되곤 한다. 성경 마태복음 7장과도 연결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
2023.11.23 12:48(줄여서 ‘민박’)은 송석하(1904~1948)에 의해 설립된 (1945. 11. 8)을 효시로 삼는다. 임재해는 「조선민속학회 창립의 산파 송석하와 한국 민속학의 길」(한국민속학 57, 2013)이란 글에서 송석하의 업적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와 같은 맥락에서 를 설립하는데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점, 사재를 털어 학회지 『조선민속학』을 간행한 업적 등을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학자들과 어울렸다는 점을 들어 식민주의 공범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민속학 및 인류학 전공의 여러 학자들이 가열찬 논쟁을 ...
2023.11.16 13:18“상여가 나갈 때 북을 치고 앞에서 인도하고 큰 소리로 울며 뒤에서 따라가는 것은, 결코 오랑캐의 풍속이다. 의관을 갖춘 집안에서 어찌 차마 이런 풍습을 본받겠는가. 반드시 요령(搖鈴) 하나를 준비하여 북을 대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또 애경사와 관계된 일은 더더욱 반상(班常)의 구별이 있어야 마땅하다.” 진도에 유배 왔던 유와 김이익이 그의 저술 『순칭록(循稱錄)』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진도의 풍속을 힐난하고 나무라는 언행은 더 이어진다. “우리 성상께서 등극하여 5년이 된 을축년(1805)은 내가 벌을 받고 이곳으로 유배 ...
2023.11.09 12:54판소리 중 어미 잃은 심청이를 안고 동냥젖 얻어 먹이는 장면에 지팡이가 등장한다. 영화나 연극 따위의 풍경을 고려한다면, 지팡이 짚고 더듬거리는 이 장면이야말로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누군가 심청가를 영화나 음악으로 재구성할 때는 참고해도 좋겠다. 서사의 얼개로 본다면 심청이가 첫 이레를 지나지 않은 점을 주목해야 한다. 대문에 걸어둔 금줄을 세이레 지나고 나서야 걷어내는 이유가 있다. 모친의 죽음과 심청의 출생은 ‘죽고 살고’라는 사건의 배치라는 점에서 내가 늘 주목하는 방식이고 장면이다. 이야기의 전개에서 심학규는 늘 지팡이...
2023.11.02 12:59병신춤이라 부르지 마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 장애자들/ 내 동생/ 어린 곱사 조카딸의 혼이/ 나에게 달라붙어요/ 오장 육부가 흔들어 대는 대로/ 나오는 춤을 추요 역설적이다. ‘병신춤’으로 유명해졌고 우리 사회와 교감했으며 'ᄆᆞᆷ'(몸과 마음의 합성어로 내가 사용하는 용어) 비틀어 한 시대의 역사를 써 내려간 분인데, 정작 ‘병신춤’을 입에 올리기라도 하면 화부터 냈다. 왜 그랬을까? 백승남이 진솔하게 집필한 단행본 제목에 그 이유가 들어있다.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랑께』(주/우리교육,...
2023.10.26 13:08올해 글쓰기의 시작을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40주년 기념 기조발표로 시작했다. 우리나라 작은 섬들의 이름을 ‘한국의 지명총람’에 기대어 분석하여 씨줄 날줄로 엮어본 것이다. 안섬과 바깥섬의 ‘토폴로지(topology)라 표현했다. 본래 수학적 개념이지만 인문지형의 형질이나 지세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차용한 것이다. 길고 짧고 크고 작고 높고 낮거나 위아래 오른쪽 왼쪽의 대칭을 들어, 섬 이름을 정하고 마치 음양(陰陽)이나 천지(天地)처럼 쌍으로 겹으로 혹은 흥부네 아이들처럼 순서를 지어 명명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편의 발표로는 ...
2023.10.19 14:14칼로 모가지를 베랴 붓으로 치랴 무명의 검객이 칼 대신 큰 붓을 들어 글자를 써 내려간다. 글씨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고 거대한 파도처럼 급습해오기도 하며 사막을 내닫는 말처럼 쏜살같기도 하다. 글자를 쓰는 듯한데 글씨가 아니요, 붓을 휘두르고 있어도 붓이 아니다. 때때로 모래판을 그어 내리는 지팡이가 되었다가 적의 목을 베는 예리한 칼이 되었다가 철학의 기운을 뿜어내는 장필(長筆)이 되기도 한다. 알지 못할 차원의 춤과 검객의 도술을 거쳐 마침내 진시황의 용좌에 검(劍)이라는 글자가 걸린다. 장이머우의 영화 ‘...
2023.10.12 14:09중국 청해성 일대의 채도무분(彩陶舞盆)과 마가요에 강강술래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난 2016년 본 칼럼을 시작하며 일곱 번째 회차에 이 얘기를 소개하였다. 세계문화사를 통틀어 댕기 머리와 치마를 입고, 손에 손을 잡고 원무(圓舞, 輪舞)하는 모습이 흔하게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릇 안쪽의 춤추는 무희들은 각각 5인조, 9인조, 11인조 등으로 나타난다. 대칭을 이루고 있다. 댕기 머리와 휘날리는 치마(일부 중국학자들은 이것을 성기로 본다). 그릇 안쪽으로 그어진 테두리까지 물을 한번 담아보자. 출렁이는 그릇 안으로 물에 비친...
2023.10.05 12:41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향과 약을 캐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 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초의선사가 일지암을 짓고 지은 시다. 내 심중에 담아두었다가 가끔 꺼내 노래하는 시이기도 하다. 나 또한 무안군 삼향읍 초의의 생가터 아래, 책 몇 권 보관할 만한집을 지어 사는 인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지암을 아...
2023.09.21 15:53지난 4월 14일 본 지면을 통해 내가 왜 갱번에 주목했는가를 소개했다(남도인문학 342). 오늘은 갱번이라는 호명의 출처에 대해 을 인용해 살펴본다. 접두어나 활용형을 다 살필 수 없으므로 일부만 추린다. 물론 이외의 용례도 방대하다. 따옴표를 일일이 붙일 수 없으므로 전부 생략한다는 점 이해 바란다. 구례군 용방면 신지리를 갱변들, 갱변똠, 선월이라고 한다. 곡성군 현정리에는 갱변들, 갱변보가 있다. 곡성군 농소리에 갱변들, 갱변보가 있다. 곡성군 율사리에 갱변들, 갱변보가 있다. 구례군 죽마리에 진등 갱변이 있다. 모두 내륙의...
2023.09.14 12:35“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비애와 수심에 가득 찬 아리랑 한 대목, 님웨일즈가 김산의 구술을 받아 쓴 책 『아리랑』에서 몇 구절 가져왔다. 만주로 중앙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져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마지막 넘었던 고개다. 일본으로 미국으로 산산이 흩어져 넘어야 했던 또 다른 문경 고개다. 떡 바구니를 인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팔다리를 떼어주고 목숨까지 바치며 넘어야 했던 스무고개다. 아리랑 노래의 ...
2023.09.07 14:35지난 1세기 수많은 장르가 쟁패를 거듭했다. 역사, 종교, 사회, 문화, 풍속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친 파란이었다. 내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열강들의 각축이라는 외부 충격이 컸다. 하나의 양식이 바뀌기까지 수 세기가 소요된 이전의 사회에 비한다면 불과 한 세기에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음악 장르라고 다를 바 없다. 간단없는 파고를 일반인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승자가 갈렸다. 오늘날 우리 음악에서 어떤 장르가 득세하는가를 보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전통음악 쪽에서는 판소리와 산조가 국악계...
2023.08.31 14:47~간다 간다 나는 간다/에이야라 술비야/ 울릉도로 나는 간다/에이야라 술비야/ 울릉도로 향해보면/에이야라 술비야/ 고향생각 간절하네/에이야라 술비야/ 고향산천 돌아오면/에이야라 술비야/ 부모처자식 반가와라/에이야라 술비야~ 거문도 술비소리 중 한 대목이다. 놋소리, 월래소리, 가래소리, 썰소리 등을 포함하여 거문도 뱃노래라 한다. 1972년 전남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남도 민요 중에서 첫 번째로 지정한 의미가 있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술비소리를 거문도 뱃노래의 하나로 설명한다. 하지만 ...
2023.08.24 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