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 나주 미천서원_미수(眉叟) 허목(許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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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옥연의 문향
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 나주 미천서원_미수(眉叟) 허목(許穆)
56세에 첫 벼슬, 81세에 우의정 지낸 청백리 ||독특한 전서 예법을 남겨 그의 작품 5점 보물
  • 입력 : 2019. 07.25(목) 13:51
  • 편집에디터

1.관리사에서 바라본 미천서원_전라남도 기념물 제29호(백옥연)

예기(禮記)'곡례상편'에 '대부는 나이 칠십이 되면 관직에서 물러난다(大夫七十而致事)'는 치사가 있다. 치사(致仕)는 요즘 정년퇴직제도와 같은 조선시대 가이드라인이다. 치사자에게는 해당 관아에서 술과 고기를 보내고, 사직(謝職)의 허락을 얻지 못하거나 업적이 큰 사람에게는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조선시대에 칠십이 넘도록 정승으로 재직한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 인물이 조선 세종대의 명재상 황희. 64세에 우의정이 된 후 87세까지 영의정의 벼슬에 앉았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 않고 천거로 56세에 벼슬을 시작, 80세에 대사헌으로 특별 임용, 이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를 거쳐 81세 우의정으로 발탁된 파격적인 인사가 있었으니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3~1682)이 그 주인공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벼슬에서 물러날 나이에 관에 들어 정승까지 올랐으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영산포 삼거리에서 나주 다시면 방향으로 구진포로를 따라 십리를 못 미친 곳, 안창동 제창마을. 앞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미곡창고가 있었다는 제창 들이 넓다. 미천서원은 뒷쪽 별봉산 자락 끝에 아늑하게 터를 잡고 있다. 강당 뒤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미천(眉泉)'이다. 허목이 어려서 외가인 나주 회진에 머물 때 동네에 우물이 없어 사람들이 물 길으러 먼 곳까지 다니곤 했다. 미천이 하루는 "저 곳을 파보라" 하여 파보니 진짜 물이 나는 샘이었던 것이다. 어디서 그런 신통력을 얻었는지는 모르나, 그 이야기는 오랜 세월 구전되어 내려왔다. 그런 연유로 샘 이름이 미천이고, 서원 이름도 미천이다. 양 옆으로 기언 목판각이 보관된 신장판각이 있고 내삼문을 지나면 조선 중기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과 정조대의 공신으로 미천서원의 원장을 지낸 채제공이 배향된 사당 미천사가 있다.

북쪽 주벽에 모셔진 위패와 영정. "마른 몸에 키가 크며 이마가 움푹하고 수염과 눈썹이 길다. 손바닥에는 글월'문(文)', 발바닥에는 우물'정(井)'의 글자가 뚜렷하고 성격은 담담화평하다." 허목이 노년의 초상화를 보고 스스로 평한 말이다. 눈썹의 길이가 거의 한 치가 되어 눈을 덮으므로 호를 '미수(眉叟)'라 했다. 초상화 속의 허목은 우의정 관복인 오사모에 담홍포를 입고 서대(허리띠)를 하고 눈, 뺨, 턱 등에 옅은 음영을 드리운 깡마른 몸매다. 성격은 대쪽같이 단호해 보이고 흰 눈썹, 긴 수염이 선비로서의 그의 풍모를 잘 보여준다. 아쉽게 당시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으나 1794년 허목의 학덕과 인품에 감탄한 정조의 명으로 은거당(숙종이 허목에게 하사한 집)에서 82세 때 초상화를 가져다가 어진화사 이명기가 모사했다. 그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점이 보물 제1509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수는 1595년(선조 28년) 현감 허교(許喬)와 나주임씨 사이에서 3남으로 한양 창선방에서 태어났다. 허목은 친가, 외가, 처가가 모두 학문을 숭상하는 문인계열의 선비 가문이다. 증조 동애공 허자는 대윤의 신원회복하다 화를 당했고, 외조부는 문과 급제하여 10년간 벼슬살이를 하다 당파싸움을 개탄하고 벼슬을 버린 후, 허균과 쌍벽을 이룬 대문장가요 호남이 배출한 조선의 위대한 사상가인 백호 임제다. 처외조부는 오리 이원익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등 3대 왕조에 걸쳐서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고 죽은 후 청백리로 선정될 만큼 청렴했다. 이원익은 "훗날 내 자리에 않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라며 장차 정승감이 될 허목의 재목을 일찍이 알아봤다. 허목은 19세에 오리 이원익의 손녀에게 장가든다.

미수는 퇴계 이황으로부터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모계 문위 등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후대로는 성호 이익을 거쳐서 다신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중심에서 여러 경전을 익혀 과거 준비를 했다.

32세 되던 해, 동학의 재임으로 있던 허목은 인조의 생부(전원대원군)을 원종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박지계를 임금에게 아첨하여 예의를 문란시킨다며 유적에서 삭제했다. 유적은 유생들의 가계, 학통, 학업 등을 기록한 기록부이며 이 유적에 등재되어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고 양반으로서 지위를 인정받게 된다. 박지계의 유적 삭제 사실을 들은 인조는 크게 노하여 허목에게 정거(과거 응시자격 박탈)의 벌을 내렸다. 오늘날로 치면 공무담임권을 박탈한 것이다. 공부하면서 과거를 준비해 온 미수로서는 청천병력이었으며 미수의 일생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아예 단념하고 20여년 오직 책을 벗 삼아 산림에 묻혀 살았다. 정거의 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제되었으나 미수는 대쪽 같은 결의에 따라 과거와 벼슬 자체를 외면하였고 인조 재위 기간에는 어떠한 정치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미수가 이러한 소신을 갖게 된 데에는 자신의 선조로부터 얻은 교훈, 오리 이원익의 처신, 백호 임제의 사상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허목은 56세 때인 효종 원년에 '박학능문 고상기지(博學能文 高上其志)' 학문이 깊어 글을 잘하고 의지가 고상하다는 이유로 처음으로 능참봉이라는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후에도 8년 동안 현감 관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조정은 남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리당략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양란 이후 백성들의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 커지자 서인들은 예학을 강화해 신분제를 고수하려고 했다. 양반에서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의 예학을 김장생이 계승하고, 김장생의 아들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이 계승해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만들었다. 서인이 이이의 개혁사상을 사장시키고 예학을 조선사회의 주류로 만든 이유는 백성들의 신분제 철폐 움직임에 맞선 지배층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예란 본질적으로 하(下)가 상(上)을 섬기는 질서이다. 또한 효종에 대한 서인의 이중적 태도도 예송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인조반정후 땅에 떨어진 왕권을 서인들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닌 자기들과 같은 제1 사대부로 보았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로 왕통은 이어 받았지만 가통으로는 둘째아들에 불과하다고 나누어 생각했으니 효종(아들)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어머니)가 입을 상복 기간으로 대립했다. 기해년 1차 예송 논쟁은 효종(아들) 사망 때 어머니의 복제에 관한 것이고 15년 후 2차 갑인 예송은 효종비(며느리)가 사망할 때 인조의 계비(시어머니)의 복제에 관한 것이었다. 왕이 죽으면 3년복을 입어야 하는데 서인은 효종을 차자로 보고 1년을 주장했고, 남인은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기해예송은 서인의 주장대로 시행됐고 남인에 속했던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66세였다.

삼척에 부임하자 곧 향약을 시행하여 지역의 풍속을 교정하고, 해일과 재난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건립했다. 척주동해비의 서체는 미수의 전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글씨로 평가된다. 벼슬에 나서기 전 산림에 있는 동안 허목은 자신만의 전서체를 만들었다. 허목전서 애군우국, 허목 청암정 편액제자를 비롯 5점이 국가보물로 지정될 만큼 동방제일의 전서 대가로 알려져 있다.

2차 예송은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갑인예송 직후 승하한 현종에 이어 숙종이 14세의 나이로 보위를 잇는 혼란한 정국 속에서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허목은 80세 나이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82세에 우의정에 이른다. 허목은 숙종의 옆에서 원리원칙과 청빈한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숙종에게 '입을 지키면 망령된 말이 없게 되고, 몸을 지키면 망령된 행실이 없게 되고 마음을 지키면 망령된 행동이 없게 된다.'라며 3수(三守)를 지킬 것을 강조했고 허목은 18훈을 써서 자손들에게 남겼다. 여색을 멀리하고 술을 과도하게 마시지 말고, 정도를 지키고, 원리원칙에 철저하고자 했다.

한 평생 청빈하게 산 그는 퇴직 후 살 집이 없었다. 숙종은 집을 한 채 하사한다. 이 집을 수고은거(壽考恩居), 오래 살아 은혜를 입으며 지낸다는 뜻으로 '은거당(恩居堂)'이라 했다. 당시까지 임금으로 부터 집을 하사받은 사람은 단 두 사람이었다. 황희가 받은 영당(影堂), 이원익의 관감당(觀感堂)이다. 임금의 집 하사는 허목이 그 반열에 든다는 의미다.

경신환국은 남인의 몰락, 서인의 부활을 가져온다. 그 전 미수는 우의정을 사임하고 연천으로 내려와 있어 직접 관련은 없었으나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시골에서 외롭게 지내는 처지가 되었다. 2년 후 숙종 8년(1682년) 미수(眉叟)는 미수(米壽)에 운명하니, 향년 88세. 숙종 14년 삭탈관작이 회복되고 이듬해 숙종은 미수의 예장을 치르게 하고 유고 문집을 간행하게 했으며 후손을 관리로 채용하도록 했다. 숙종 18년 미수에게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별도 소박스

미수와 우암, 고수들의 일합

미수 허목은 남인의 영수였고, 우암 송시열은 서인의 거두이자 노론의 영수로 둘은 정적 관계였다. 어느날 우암이 그만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그는 특이한 요법으로 건강을 유지했는데, 매일 아기의 오줌(童尿)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 덕에 추운 겨울에 냉방에서 잠을 자도 그로 인해 오히려 방안이 훈훈해졌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했다. 그는 아들을 불러 "미수대감께 가서 병세를 소상히 말씀드리고 화제약방문를 좀 얻어 오라."고 시켰다. 당시 최대 정적인 남인의 영수 허목에게 약방문을 얻어오라니. 아들은 "장안에 허다한 의원들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미수대감에게 부탁하십니까? 만일 화제에 독약이라도 넣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시냐?"면서 펄펄 뛰었다. 그러나 우암은 가족들의 청을 못들은 체 하고 큰 아들에게 채근하였다. 아들은 하는 수 없이 허목을 찾아가 우암의 병세를 이야기 하자 그것은 오줌을 지속적으로 마신 결과에서 오는 요독(尿毒)으로 인한 중독증세라고 하며 화제를 지어주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허목이 적어 준 화제를 보니 약재 중에 독약인 비상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했던 일인데 실제로 독약이 들어 있는 것을 본 가족들은 대경실색하였다. "아버님을 독살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아무리 남인이라지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암은 가족들이 허목을 성토하는 것을 크게 꾸짖고, 곧 화제대로 약을 지어오게 하였다. 가족들이 극구 나서서 우암의 마음을 돌려보려 하였으나 우암은 끝내 독약이 든 약을 마시고야 말았다. 우암은 곧 쓰러져야 했으나, 이러한 가족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오히려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것은 바로 독으로 독을 중화시키는 이독치독(以毒治毒)의 방법으로 극약처방이다.

우암은 미수가 의술에 밝고 공명정대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미수는 또한 우암의 덕망과 도량을 믿었기에 화제를 물리치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미수와 우암은 경륜과 포부가 달라 정파(政派)를 달리하고, 정사(政事)를 논함에 있어서는 갑론을박하여도 인격적으로 서로 믿고 존경하며 아껴주는 도량이 있었던 것이다. 절륜의 무공을 지닌 고수들의 아름다운 일합이 아닌가.

2.외삼문과 묘정비(백옥연)

3.미천서원 강당(백옥연)

4.강당 뒤에 위치한 미천眉泉_어린 미수의 예지력으로 찾아낸 샘(백옥연)

5.미천서원 사당 미천사

6.미천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기언목판 , 1816판이 소장되어 있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17호. 나주시 제공

7.미수의 외조부 백호 임제선생이 공부를 하던 영모정.

미천서원 미천사에 소장된 미수 허목 영정_백옥연

미천서원 앞을 흐르는 영산강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