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들 "투표하기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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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시각장애인들 "투표하기 힘드네요"
보조용구 기표란 좁고 후보자 정보 제한돼||점자공보물 분량 한계로 공약 파악 어려워
  • 입력 : 2020. 04.14(화) 17:27
  • 양가람 기자
시각장애인 유권자들은 구멍이 뚫린 '점자투표 보조용구' 안에 일반 투표용지를 끼워 넣고 기표를 한다. 시선관위 제공
시각장애인 A씨는 지난 9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사전투표소를 방문했다가 당혹스런 일을 겪었다. 본인 확인 절차 때 복지카드를 내밀었지만, 어느 누구도 먼저 나서 점자투표 보조용구를 제공하지 않았다. A씨가 보조용구를 요구한 후에야 당황한 직원이 조치를 취했지만, 투표 용지가 2장인 걸 감안하지 않고 1개의 보조용구만 가져다주었다.

광주시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 따르면, 광주 지역 시각장애인 유권자는 총 1809명이다. 4·15 총선 사전투표소를 찾은 시각장애인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들에 대한 배려는 물론 관련 법규 손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기표란 협소·기표여부 확인 불가능… 비밀투표권 침해받아

코로나19는 투표 현장의 풍경도 바꿔놓았다.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유권자들은 비닐장갑을 끼고 투표에 참석해야 한다. 하지만 손끝의 감각에 의지해 기표를 해야하는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쉽지 않다.

시각장애인 유권자들은 일반 유권자들이 사용하는 투표용지를 구멍이 뚫린 '장애인용 점자투표 보조용구'에 끼운 후 투표를 한다. 이번 선거의 비례대표 투표용지는 길이가 48.1cm에 달할 정도로 길다. 그 탓에 보조용구의 틀 안에 넣었을 때 기표 공간(칸)이 너무 좁아져 시각장애인 유권자들이 어려움을 겪는다.

사전투표에 참석한 최삼기 ㈔광주시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은 "용지가 길다보니 칸 간격이 좁아 인주를 묻히는 과정에서 옆 칸에 번지거나 보조용구에 (인주가) 묻어났다"면서 "이래선 비밀투표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또 "칸이 좁은 탓에 (후보자를)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면서 "동행인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혼자의 힘으로도 어려움 없이 투표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구 투표 보조용구에는 후보자 이름과 소속 정당이 나와있지 않다. 대신 현장에서 기호만 스티커로 붙여 유권자에 제공된다. 이름과 정당을 알기 위해선 현장 직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A씨는 "기호와 후보자 이름, 정당 이름까지 모두 표기할 수 있도록 점자 투표 보조 용구를 만드는 건 A4 용지를 A3 용지로 바꿔 더 긴 문장을 인쇄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면서 "당장 개선 할 수 있는 문제들인만큼 투표 보조용구와 관련된 선관위 규정이 손질돼야 한다"고 말했다.

어렵게 기표를 한 이후에도 문제는 계속된다.

A씨는 "도장을 찍긴 했지만 잘 찍힌 건지 확인할 수 없었다"면서 "주변 사람에게 '기표가 제대로 됐는지' 확인을 부탁해야 하는데, '비밀 투표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 점자 공보물 면수 제한으로 정보 접근에 제한

그동안 시각장애인과 유관 단체들은 선거 과정에서의 정보 접근성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이번 4·15 총선에서도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성 문제는 불거졌다.

시각장애인 유권자들은 우편을 통해 책자형 선거공보물과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함께 받는다. 선관위에 따르면, 광주지역 총선 출마자 42명 가운데 점자형 공보물을 제공한 후보는 31명이었다. 나머지 11명은 책자형 선거공보물 오른쪽 상단에 음성변환용바코드(보이스아이코드)를 출력해 제공했다.

보이스아이코드는 다량의 문자정보를 음성으로 전환해 준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인에게 편리한 수단이지만, 실효성이 크지는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A씨는 "바코드를 인식하려면 어플이나 전용 단말기가 필요하다"면서 "시각장애인에게는 혼자 휴대전화 카메라로 거리나 각도를 맞추는 게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전용 단말기를 사용하기엔 가격이 비싸 보유한 이가 극히 드물다. 궁여지책으로 보이스아이코드가 사용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크게 유용하지 않다는 입장이다"고 말했다.

결국 시각장애인 유권자 입장에서는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지만, 선거법상 한계로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다.

공직선거법 제65조(선거공보)를 살펴보면 점자형 선거공보물은 일반 선거공보물과 동일하게 면수가 제한돼 있다. 점자형 선거공보물이 일반 선거공보물의 3배 분량임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면수 제한은 유권자의 정보 접근성을 떨어트린다. 실제 상당수 점자형 선거공보물은 분량의 한계로 선거 정보가 중간에 끊기는 등 후보자의 핵심 공약 파악이 쉽지 않다.

지난 3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에게 '시각장애인이 장애인이 아닌 사람과 동등하게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와 정책·공약 알리미에 있는 공직선거 후보자 등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A씨는 "비장애인 유권자의 참정권 보장 수준은 많이 향상됐지만 장애인 유권자들의 참정권 보장은 갈 길이 멀다"면서 "시각장애인도 주권자인 만큼 공보물 접근성과 점자 투표 보조 용구 개선이 정권을 교체하는 일보다 빨리 이루어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