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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한국광복군 주력부대 제5지대장, 나주 출신 나월환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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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한국광복군 주력부대 제5지대장, 나주 출신 나월환 장군

나주 왕곡 출생… 도일후 박열 등과 교유
1939년 10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결성
1940년 9월 충칭 임정 한국광복군 합류
시안에 본부 두고 사령부 호위·장병 훈련
1942년 노선갈등 불만품은 부하에 피살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독립운동가 선정

게재 2020-06-16 18:34:57
한국광복군 주력부대인 제5지대를 이끈 나주출신 나월환 장군의 동상. 나주시 제공
한국광복군 주력부대인 제5지대를 이끈 나주출신 나월환 장군의 동상. 나주시 제공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 나월환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 나월환
나월환의 광복군 제5지대 창설기념 사진
나월환의 광복군 제5지대 창설기념 사진
인도 전선에 파견된 나주출신 광복군 나동규
인도 전선에 파견된 나주출신 광복군 나동규
2014년 9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나월환
2014년 9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나월환

광주·전남 출신 광복군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정착지였던 쓰촨청(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된다. 한국광복군은 한말 의병과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의 전통을 계승한 무장 조직이었고, 1946년 5월 복원선언을 발표하고 해산할 때까지 6년여 동안 중국 일대에서 활동했다.

6년 여 동안 존재했던 한국광복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1945년 4월 임시정부 군무부장이 김구에게 보고한 보고서를 보면 총사령부와 3개 지대의 장교 및 사병은 총 514명(중국군 장교 65명 포함)이었고, 이중 광주·전남 출신은 42명이었다.

42명의 광주‧전남 출신 광복군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나주 출신인 광복군 제5지대장 나월환이 이끈 제5지대는 광복군 초창기 4개 지대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확보한 광복군의 주력부대였다.

광복군 제1지대 소속의 담양 출신 김용재와 제2지대 소속의 나주 출신 최창희는 초모사업에서 활동하였고, 순천 출신의 조경환은 총사령부 정훈처가 창간한 광복군 기관지 '광복'의 간행을 주도하였으며, 광주 출신의 제3지대 소속인 박상기는 기관지 '빛'의 편집을 담당했다. 나주출신 나동규와 보성 출신 최봉진은 영국군 동남아전구 총사령부가 있었던 인도 전선에 참가하였고, 제2지대 소속의 강진 출신 박금동은 OSS 훈련을 받고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한 대원이었다. 고흥 출신의 유한휘는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속되어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광복군이 또 있다. 나주 출신인 여자 광복군 임소녀(1908~1971)가 그다. 나주 출신 광복군으로는 이미 언급한 나월환과 나동규, 최창희, 임소녀 외에도 김종호, 박성화, 이준수 등이 있다.

광주·전남 출신 광복군 42명 중 나주 출신은 제5지대장인 나월환 포함 7명으로 가장 많다. 그리고 위에서 살핀 것처럼 단연 돋보이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 나월환

42명의 광주·전남 출신 광복군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분은 광복군 제5 지대장을 지낸 나주 출신 나월환 장군이다. 광복군 총사령부 밑에 4개의 지대가 있었고, 초반 50여 명이 채 되지 않던 광복군 편제에 나월환이 200여 명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을 이끌고 합류했으니, 당시 광복군에서 그의 위치가 짐작된다.

나월환(羅月煥, 1912~1942)은 1912년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에서 나종성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금성나씨의 시조인 고려개국공신 금성부원군 나총례의 31세손이다. 1922년 나주시 왕곡면 양산리 개교된 양산보통학교에 입학, 1928년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간다. 나월환은 세이쇼중학교(城成中學校)과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입학한 후 수감 중인 박열을 면회하고 아나키즘 성향을 갖춘 한인 학생들과 사귀며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이후 그는 중국으로 건너간다. 그런데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는 과정이 극적이다. 동경에서 웅변대회가 열려 많은 유명 인사들이 참관했는데, 그중에는 장제스의 친위대장인 전대균(錢大鈞)도 있었다. 전대균은 나월환의 연설을 감명 깊게 듣고 장래에 큰 인재가 될 재목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나월환을 설득해 1931년 9월 상하이로 데려간다.

중국으로 건너온 나월환은 양여주 등 혈기왕성한 30여 명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1932년 5월 김구의 주선에 따라 다른 청년연맹들과 연대해 서간단(鋤奸團)을 결성하여 일제에 빌붙은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했다.

1934년 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립되자 나월환은 일본에서 인연을 맺은 장제스의 전위대장 전대균의 도움으로 졸업 후 중국 헌병 장교가 된다.

1937년, 나월환의 형 나일환이 사업차 중국에 들러 난징의 동생을 찾아왔다. 며칠 후 나일환이 귀국길에 오르자, 나월환은 상하이 부두까지 나와 형을 배웅한다. 이때 일본 영사관 형사대가 급습해 그를 체포했다. 나월환은 산둥성 칭다오(靑島)에서 출항한 배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탈출에 성공한 뒤 난징에 돌아왔고, 이후 탁월한 용기와 대담함을 갖췄다는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중앙육군군관학교 교수 배지를 달고 다닐 수 있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1939년 10월, 나월환은 군관학교 출신인 박기성 등과 함께 중국 군대를 떠나 독자적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여 대장에 취임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12명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군사기관에 복무하였거나 상해,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청년지사 30여 명이 모여 조직하였는데, 공작대원 중에는 김구의 장남 김인과 조소앙의 장남 조시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0년 말, 시안과 충칭에서 한인들이 조직한 항일무장단체로는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있었다.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왕성한 활동을 보고 그들을 자신들 편에 끌어들이려 애썼다.

한국광복군 제5 지대장, 나월환

나월환은 한국광복군을 선택했다. 1941년 1월 1일 신년 단배식이 끝난 후, 나월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전원을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합류한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 200여 명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었고, 공작대장 나월환은 제5지대장에 임명된다. 당시 광복군의 병력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나월환이 이끈 제5지대가 초기 한국광복군의 주력이었음을 보여준다.

광복군 제5지대는 시안(西安)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하면서 장병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남·화북성(河南·華北省) 등지로 나가 초모, 선전 및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5월에는 시안에서 군민 위안 및 일선 장병 위문품 모집 공연을 하였는데, 그는 이 대회 주임으로 '국경의 밤', '한국의 1용사', '아리랑' 등을 공연토록 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1942년 3월 1일, 나월환은 3·1 운동 기념식을 마친 뒤 제5지대 본부에서 호종남(胡宗南) 부대가 제공한 영화관람권을 대원들에게 나눠주다 실종된 며칠 후 제5 지대 본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연호공원 우물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노선 갈등으로 불만을 품은 부하 박광운에게 피살된 것이다. 31세의 한창 일할 나이인데,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었다. 2006년 나주시민공원에 건립된 그의 동상에는 "하늘도 땅도 동지 모두가 울었다"라고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총을 쏘았던 박광운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배후 조종자였던 이하유·김동수는 무기징역형에 처해졌으며, 이해평, 이도순, 고여순은 15년형, 김송죽(김천성), 김용주는 2년 형을 선고받는 등 제5지대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1942년 4월 1일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했을 때 조선의용대는 제1지대로, 그리고 제5지대는 기존의 제1지대, 제2지대와 통합하여 제2지대로 재편된다.

광복 후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일행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나월환의 유해도 화장되어 유골함에 넣어진 채 국내로 들어온다. 그의 유해는 곧바로 태고사(지금의 보은사)에 옮겨져 그곳에서 49재를 지낸 뒤 나월환의 아버지 나종성에게 전해졌고, 나종성은 가야산 중턱에 나월환을 묻는다.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나월환의 무덤은 한동안 볼품없이 방치되다, 1986년 금성나씨 문중에서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복룡마을 선산으로 이장했고, 2003년 대전 현충원으로 또 옮긴다.

오늘 나월환은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으로 당당하게 다시 부활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14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다. 무덤은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안식을 찾았고, 2005년 나주 시민들을 그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나주공원에 권총을 든 그의 동상을 세운다.

국가보훈처가 확인한 일제강점기 수형인 명부
국가보훈처가 확인한 일제강점기 수형인 명부

남도는 독립운동의 보고이자 비밀금고

흔히 '남도 정신' 하면 '정의로움', '항일', '독립' '민주화'라는 말로 회자(膾炙)된다. 어느 지역보다 당시의 시대정신인 이런 가치들을 앞장서 실천했던 흔적들이 조금 더 두껍게 축적된 결과의 산물일 게다.

최근까지만 해도 광주·전남은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 활동을 통한 항일과, 5·18 민주항쟁으로 상징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앞장서 실천한 민주화운동지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 성과가 보태지면서 광주·전남은 독립운동의 중심지, 독립운동자금의 비밀금고였음도 드러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2018년 '일제강점기 수형인명부'에 대한 전국 시(군)·읍·면 전수 조사를 실시하여 독립운동 관련 수형자(受刑者) 5,323명을 확인했다. 독립운동 관련 수형자 5,323명은 보안법·소요·대정8년 제령7호·치안유지법 등을 위반한 자를 통계 낸 수치다. 일제가 제정한

보안법·소요·대정8년 제령7호·치안유지법은 독립운동자들을 때려잡았던 악법임을 두말을 필요치 않는다. 이 중 다소 낯선 '대정 8년 제령7호'란 '3·1만세운동'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일본이 한 달 보름 만인 4월 15일 독립운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법령으로, 기존의 보안법보다 5배의 가중처벌을 규정한 악법 중의 악법이다.

그런데 보훈처가 발표한 5,323명 중 광주·전남 출신의 인물이 1,985명으로 가장 많다. 참고로 타 시도를 보면 대전·충남이 1,205명, 인천·경기가 456명, 대구·경북이 404명, 제주 214명, 부산·경남이 198명이었다. 광주·전남의 1,985명은 전체 독립운동으로 감옥살이를 한 전체 인원의 37.3%를 차지한다. 광주·전남을 독립운동의 보고(寶庫)라고 부르는 이유다.

광주·전남인들은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9년 4월 전남대학교 김재기 교수는 광주·전남인들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조직적으로 참여한 조선총독부 경무국 문서를 분석한 자료를 공개했다. '전라남도에서 가정부(假政府, 임시정부) 조선독립군 자금모집원 검거'라는 제목으로 작성되어 일본 외무성까지 보고된 이 문서에는 북간도 신흥무관학교 한문 교사인 신덕영이 최양옥 등과 함께 광주 3·1운동 주도자 이윤호·노석정 등을 비밀리에 만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조선민족대동단 단원들인 이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농림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회원을 모집하고 불입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았다. 전라도에서 40여 명이 참여해 약 8천원을 모았는데, 현재 가치로 5억여 원으로 추정된다. 김교수는 독립운동 모금에 앞장 선 '광주·전남을 임시정부의 비밀금고'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 조세의 절반 정도를 충당했던 전라도 때문에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던 역사를 또 계승하여 실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