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부채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부채
  • 입력 : 2020. 06.17(수) 10:30
  • 편집에디터

평양감사부임도 병풍 중 모흥갑 능라도 판소리공연장면,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대동강변 능라도, 차일을 두른 유람선들이 즐비하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들, 쪽 지은 기생들을 싣고 바람 없는 물가에 유유히 떠 있는 풍경이다. 예로부터 기성팔경의 하나로 꼽히던 곳이었으니 강변의 바위들 너머엔 모란봉이 밑그림처럼 포진해있을 것이다. 이물 뱃전에 올라있는 이는 숙달된 사공일 것이요, 고물 뱃전까지 무엇을 장식한 듯도 하고 풀숲을 싣거나 물건을 실은 배들도 있으니 대동강이 마치 대로를 운행하는 사통팔달의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풍경의 중심에는 일군의 선비들이 상다리가 휘어지는 잔칫상을 앞에 두고 능수버들 숲의 한 가운데를 응시하고 있다. 엿장수는 물론 어린 기생들도 다소곳이 앉아 있으니 필시 성대한 잔치임을 알겠다. 자세히 보면 능라도라는 글귀와 명창 모흥갑이라는 글귀가 선연하다. 평양감사 부임시에 벌였던 판소리 공연 장면이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열 폭짜리 <평양감사부임도>중의 하나, 아마도 적벽가를 부르는 중이었을까? 고수관, 송흥록, 염계달 등과 8명창으로 불렸던 호남의 이름난 광대 모흥갑의 풍모가 한눈에 읽힌다. 그런데 유독 눈에 잡히는 것은 고수 앞에서 장삼자락을 펄럭이며 목청을 한껏 뽐내는 모흥갑의 손에 들린 부채다. 19세기 초반, 판소리 공연을 그린 최초의 이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리의 법통이다. 고수와 창자가 판소리의 공연 양식이듯 부채가 한 몸을 이룬 까닭은 무엇일까?

부채(扇)에 실은 판소리의 법통, 발림과 너름새

공연을 하면 더워서였을까? 군산대 최동현 교수는 판소리의 기원설 중 가장 하나인 '무가기원(판소리가 무속음악에서 나왔다는 설)'을 들어 무당들의 부채사용 관습을 든다. 무당들만 부채를 드는 것이 아니다. 줄타기 광대들도 큰 부채를 든다. 바람의 향방을 좇아 균형을 잡아야하기 때문이다. 소리꾼은 부채를 접어 소리를 하다가 어느 대목에서는 쫙 하고 펼쳐들며 장면의 전환이나 이완을 이끈다. 판소리꾼들이 반드시 부채를 드는 까닭은 소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기능 혹은 총체적 미장센이었을까? 혹자들은 노래 가사를 훔쳐보는 컨닝페이퍼 역할로도 쓰고 춘향전에서는 곤장이 되었다가 흥부전에서는 박타는 톱이 되기도 하며 심청전에서는 지팡이로 쓰이기도 한다. 한사람의 창자가 연행하는 모노드라마이니 천변만화를 부채 하나로 표현하며 연행하는 것이다. 필수품을 넘어 판소리의 구성요소인 셈이니 아니리 및 창(唱)과 더불어 '발림'을 부채 없이 상상하기 어렵다. '발림'은 농악이나 여타 풍물놀이의 춤사위를 가리키는 '너름새'를 말한다. 너그럽고 시원스럽게 말로 떠벌려서 일을 주선하는 솜씨라는 뜻도 있다. 유무형의 몸짓 모두를 부채가 이끌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판소리나 무당굿, 줄타기, 한량무에서만 부채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기능을 넘어선 부채의 역사가 융숭 깊다.

단오선물은 부채요 동지선물은 책력

논농사권역의 가장 중요한 절기가 추석이라면 밭농사권역의 가장 중요한 절기는 단오다. 강릉단오제, 법성포단오제 등 유네스코와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등재된 축제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관련 유속들이 전승되어왔다.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수뤼치떡 혹은 쑥떡을 해먹으며 여자들은 그네를 뛰고 남자들은 씨름을 하는 등 눈에 익숙한 풍경들이 많다. 가슴과 엉덩이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매혹적인 장면, 기생들이 계곡물에 몸을 씻고 승려들이 엿보는 신윤복의 '단오풍정'은 단오의 드라마를 넘어 스토리텔링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고많은 풍속 중 대표적인 것은 절기선물 단오부채(端午扇)다. 조선시대에는 공조(工曹)에서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하고, 이를 신하들에게 선물하는 국왕 하사품이었다. 대륜선(大輪扇)은 국왕을 호위하는 기능을 했다. 동그랗게 펴서 겉살을 맞붙여 볕을 가리는 양산(陽傘) 형식이다. 손에 3고(錮)의 금강저를 들고 있는 불교 태장계 금강수원 33존의 하나인 금강대륜(金剛大輪)의 이름이기도 하니 불교와의 친연성도 엿볼 수 있다. 미혹을 끊는 지혜와 덕이 매우 크기 때문에 대륜(大輪)이라 하는데 꽃 따위의 송이가 큰 것 예컨대 대국(大菊)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김혁의 연구에 의하면 부채는 왕의 선물정치를 가능하게 하던 덕치주의의 이념적 근거였다. 이 이념은 현실에서 증여로서 표상되며 남성, 어른, 양반 중심의 억압적 질서가 초래할 긴장 및 폭력적인 양상을 은폐하는 도구로 기능해왔다. 부채 자체가 신분제적 사회질서를 강화시키는 원리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절선(節扇) 즉, 중요절기 중의 하나인 단오 선물이 부채라는 언설은 국왕이 독점하는 증여 체계에서 국왕의 은혜를 표상하는 대표적인 상징이었던 셈이다. 단오와 조응관계에 있는 동짓날에는 '책력반사'를 한다. 관상감에서 다음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중에 헌납하는데, 그것을 백관에게 나누어주던 행사다. 북한의 김정은이 대를 이어 수행하는 선물정치나 여타 정치인, 공직자들의 절기선물의 전통적 함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혁은 이를 자애로운 아버지상의 하나로, 국가적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요체로 읽어내고 있다. 불교 용어 대륜과 무당들의 부채, 판소리꾼의 부채, 줄타기꾼의 부채, 한량무춤의 부채 등이 갖는 시대적 지형과 일종의 권위의 출처를 상상해볼 수 있겠다.

국왕의 선물에서 명나라 수출까지

"고려의 부채에는 종이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 있다. 금광죽(琴光竹)으로 자루를 만들었는데, 마치 시정(市井)에서 만든 접첩선(摺疊扇)과 같으나, 정교하고 치밀하여 중국의 것이 미치지 못한다. 부채를 펴면 폭이 3,4척 가량 되고, 접으면 겨우 두 손가락 너비만 하다." <해동역사>(권29)에 나오는 내용이다. 문자 그대로 첩첩이 접었다가 펴기를 반복할 수 있는 부채를 설명했다.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하면 중국의 둥근부채가 따라오지 못한다고 했겠는가. 국왕의 선물에서 나아가 대외 수출을 담당하던 품목으로 발전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구도영의 연구에 의하면, 16세기 조선에서 명나라로 수출하던 품목 중 대표적인 것도 부채였다. 인삼과 은, 마포 등을 비롯해 사대부들이 주로 사용했던 고급생활용품들 예를 들어 갈모(笠帽,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던 고깔과 비슷한 모자), 문구류(벼루, 붓, 먹)을 비롯해 접선(摺扇) 부채들이다. 단선은 둥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둥글부채'라 하고 '방구부채'라고도 하는데 '단선'만 표준어로 채택되었다. 접선은 문자 그대로 접고 펴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실용성이 있고 심미적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단선(團扇)을 대체하여 접선이 보편화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이 중국수출이라 한다. 물론 남송대에 중국에도 접선이 있기는 하였지만 이러한 형태의 부채 확산에 조선부채의 영향력이 컸다는 뜻이다. 명나라 태조가 접선 부채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이를 고려부채(高麗扇)라 하였다. 종국에는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에 이르러 접선이 단선을 대체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채의 역사와 종류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하였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그 해 8월에 일길찬 민극을 파견하여 이를 하례하고 드디어는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대화살(竹箭)을 보냈다." <삼국사기> 견훤조의 내용이다. 공작선이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초기에도 나라의 의식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공작선은 붉은 빛으로 공작을 화려하게 그린 부채다. 자루의 길이가 1.8미터 정도라 하는데, 견훤이 보냈던 공작선은 어떤 부채였을까? 공작의 깃으로 부채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 동아시아 전통이라는 점을 참고하면 깃털을 사용했거나 혹은 둥근부채 형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채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기능상으로는 손으로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이니 무더위가 있는 곳에서는 아마 인류역사와 함께하였을 것이다. 나뭇잎이나 풀들을 엮거나 새의 깃털을 뽑아 부치다가 종이나 천의 발명으로 이어졌지 않았겠는가. 국어사전에서는 대오리로 살을 하고 종이나 헝겊 따위를 발라서 자루를 붙여 만드는 물건으로 풀이하고 있다. 한자말로는 선자(扇子)다. '바람을 부치는 채'를 줄여서 부른 말이니 수동 에어콘이다. 종류도 많고 이름도 많다. 역사 이래 각종 문헌에서 관련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다. 부채는 크게 둥근부채(방구부채) 형식인 단선(團扇) 혹은 원선(圓扇)과 접부채 형식인 접선(摺扇)으로 나뉜다. 둥근부채는 오엽선, 연엽선, 파초선, 태극선, 아선, 오색선, 까치선, 진주선, 공작선, 청선, 홍선, 백우선, 팔덕선, 세미선, 미선, 송선, 대원선 등이 있다. 접부채는 백선, 칠선, 유선, 복선, 승두선, 어두선, 사두선, 반죽선, 외각선, 내각선, 삼대선, 이대선, 단목선, 채각선, 곡두선, 소각선, 광변선, 협변선, 유환선, 무환선 등이 있다. 장르별로는 무당부채, 판소리 부채, 줄타기부채, 한량무부채 등 다양하다.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는 부채들로는 전주를 중심으로 한 합죽선(얇게 깎은 겉대를 맞붙여서 살을 만든 부채)과 전남의 접선(겉대나 속대를 깎아 접었다 폈다하는 쥘부채)이 대표적이다.

남도인문학팁

전남문화재 제48-1호 접선장 김대석의 부채

전남 담양의 김대석(1948년생)은 전남문화재 제48호 선자장 겸 제48-1호 접선장으로 우리나라 접선장의 대표다. 조선후기 공조(工曹)에 속하여 쥘부채를 만드는 일을 하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첩선장(貼扇匠)임을 주목하면, 그 대물림의 역사가 얼마나 융숭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1900년경의 증조부 김권수를 이어 김항중, 김유현, 김영일로, 다시 부친 김용하에서 김대석으로 이어온 부채 명가다. 김씨가 만들고 있는 부채로는 백첩부채, 무용부채, 무당부채, 줄타기부채, 기름부채, 대접선, 대륜선(궁중부채, 무당부채), 백선, 흑선, 신문잡지부채, 황칠 및 옷칠부채, 한량부채, 오방색부채, 방명록부채를 비롯해 담양홍보 부채 등이 있다. 기능별 목적별 형태별 재료별로 각기 부르는 이름들이기 때문에 등가적이지는 않다. 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부채는 대선(30센치), 중선(27센치), 소선(25센치) 등이 대표적이고 김씨가 여러 자료를 통해 연구하고 재구성한 부채들도 있다. 대통령이나 연예인들의 신문기사를 그대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대접선은 45센치 이상, 백첩부채는 살이 50개, 무용선은 27개 등 살수에 따라 50새, 30새 등으로 부른다. 재료는 크게 3년생 왕대나무의 속대와 겉대, 한지와 마지 등 종이와 천, 이외에 황칠, 들기름, 콩기름 등 색료 등이다. 전통적으로는 나주의 부채가 이름이 있다 했는데 대나무의 고장이니 지금은 담양이 부채의 명소가 되었다. 장르와 종류에 따라 쓰는 글귀, 그림이 따로 있고 때때로 재구성해 넣기도 한다. 사용하는 도구로는 톱, 대쪼개는 자작칼, 대깎는 초지칼, 구멍 뚫는 비비, 떠내는 목살칼, 끝 자르는 가위, 종이 자르는 뒤절칼, 종이날개 자르는 전심칼, 평평하게 다듬는 앞나리를 비롯해, 톱과 망치 등 그 종류만 수십 가지다. 전주의 합죽선이 선비들의 것이라면 담양의 접선(일명 민합죽선)은 기능성이 강조된 서민들의 것이랄 수 있다. 여러 가지 소망들이 있으나 특히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다시 지정되어 동아시아는 물론 남도의 전통부채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꿈을 갖고 계신다.

신윤복 단오풍정, 간송미술관 소장

자비로 마련한 부채전시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접선장 김대석,이윤선촬영

3년생 왕대나무를 다듬고 있는 접선장 김대석씨 부부, 이윤선촬영

김대석 명인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부채

대나무 구멍뚫는 비비와 부채만드는 방목

대를 이어 부채를 만들고 있는 내력을 족보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김대석 명인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