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기고·박주성>담헌 이하곤·공재 윤두서의 금란지교(金蘭之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 오피니언

기고·박주성>담헌 이하곤·공재 윤두서의 금란지교(金蘭之交)

박주성 글로벌평화연구소장·정치학 박사

게재 2020-07-30 13:32:45
박주성 글로벌평화연구소장·정치학 박사
박주성 글로벌평화연구소장·정치학 박사

'젊은 날 몸 바쳐 금란지교 맺었으나(撥棄形骸托契偏), 중간에 세상사가 이렇게 처연하게 되었네(中間世事却悽然), 오늘 밤 녹우당 달빛 아래서(今宵綠雨堂前月), 홀로 남아 공재 아들과 옛일을 회상하네(獨與阿郞話昔年)', '긴 수염 넓은 이마 잘생긴 얼굴(長髥廣顙好容顔), 십 년 동안 흉중으로 그 몇 번을 왕래했던가(十載胸中幾往還), 가졌던 풍류 모두 거두어 떠났으나(盡斂風流歸地下), 오직 화권만 세상에 남겨두었네(獨留畵卷在人間)'.

이 시는 담헌(湛軒)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 1722년 정신적인 벗(神友)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7번째 기일 며칠 전에 녹우당을 방문해 공재의 아들 윤덕희와 이야기를 나누며 감회에 젖어 쓴 시다.

조선 4대 장서가로 문화와 예술을 애호한 담헌이 선비 겸 화가였던 공재와 맺은 금란지교(金蘭之交)는 후대의 귀감이 됐다. 나이는 공재가 9년 연상이나 당대의 문사를 자처한 담헌은 이미 28-9살 무렵부터 공재와 친교를 맺고 왕래했다. 담헌은 공재에 대해 '효언(공재)은 천하의 뛰어난 선비로(孝彦天下士), 뜻과 기개는 고금을 통하였다(意氣橫古今)'고 하였으며 극사실주의가 돋보이는 공재자화상에 대한 찬시에서는 공재를 '세상을 초월한 고결한 뜻과 겸손한 군자의 위의를 갖춘' 인물로 극찬하고 있다.

당시 사실주의와 관련해 서양에서는 르네상스기에 세밀하고도 사실적인 화풍이 유행했는데 이러한 사조가 조선에서도 담헌과 교우들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담헌은 기존의 회화, 시의 형식 등이 가지고 있는 교조주의, 형식주의에 반기를 들고 사실주의, 실용주의를 강조했다. 이러한 담헌의 사실주의는 여행 도중 남도의 풍광과 인정을 자세히 묘사한 그의 여행기 남유록에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담헌은 평소 시는 마음을 표현하면 족하다고 주장하며 가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시를 쓰기도 했다. 인본주의자인 담헌은 신분제에 얽매이지 않고 뜻이 맞으면 중인들과 친교하고 하인들을 대우했다. 붕당과 엽관의 세태를 혐오하였던 그가 서인 가문임에도 남인출신 공재를 격의없이 찾은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내덕외경(內德外敬)하였던 공재는 그림에 있어서 인물화, 말 그림에 능했다. 공재는 정교한 필세(筆勢)로 사물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형사(形寫)함과 동시에 사의성(寫意性, 傳神)을 통해 그림에 영혼을 불어넣어 그림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줬다. 이렇게 화도(畵道)의 일가를 이룬 그는 만물에 대한 정(情), 식(識), 학(學), 공(工), 재(才)가 모두 능통하였을 때 비로소 화도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경사자집과 천문지리, 병법, 예술에 능통하여 세상과 사물에 대한 높은 식견과 깊은 심미안을 가진 담헌과 공재는 두 마리 용이 구름 속에서 유유하듯 세속을 초탈한 벗이 됐다. 공재는 신필(神筆)로 알려진 화재(畵才)까지 구족하여 예술을 사랑한 두 사람이 서로 존중하며 신교한 것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하늘이 필요했는지 1715년 공재가 48세로 세상을 버리자 서로 간담상조하던 담헌은 지음(知音)을 잃고 홀로 남겨진 비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림은 신의 작품 같고(筆端造化元神品), 경륜은 더욱 뛰어났네(腹裡經綸更異才), 종애와 한번 이별한 후에는(一自鍾崖分手後), 세상에 더불어 회포 나눌 이 없네(世間無與好懷開)'.

공재를 그리워하던 담헌 역시 녹우당 방문 후 2년 뒤 48세에 공재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