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20>【괘불탱・괘불지주】 ③ 괘불재 법식法食은 17세기 대기근 때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던 습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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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20>【괘불탱・괘불지주】 ③ 괘불재 법식法食은 17세기 대기근 때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던 습속
  • 입력 : 2020. 10.15(목) 14:02
  • 편집에디터

1. 화엄사 영산회괘불탱(1653년, 사진 문화재청)

괘불은 전후 복구 중창 불사용으로 제작

괘불의 형식미에는 나라를 지켜냈다는 담대한 자부심에서 오는 미의식뿐만 아니라 임진 병자 양대 전란 후 사찰의 중창과정에서 복구가 채 되지 않은 상태로 야외(마당)에서나마 미리 예불을 보거나 재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긴급히 제작한 후불벽화의 야외 버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한 발짝 더 나가 전란 때 불타버린 불전이나 약탈당한 불상 등에서 입은 피해 의식이 이동이 어려운 벽화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두루마리형 걸개그림인 괘불탱을 탄생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상상해 본다. 특히 많은 시간과 경제력이 들어가는 벽화가 화재로 일시에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본 뒤로부터 후불벽화는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괘불과 후불탱화가 그 빈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 조선 시대 불교미술의 한 양식으로 정립되어 18세기 이후 후불탱화의 대유행을 가져오게 했다. 이처럼 전후 복구 중창 불사용으로 조성된 괘불이 당시 사회에 던져준 충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압도적인 크기나 화려한 색채에서 오는 담대한 미의식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문화적 충격 상상 그 이상이다.

괘불 등장 배경을 밝혀줄 키는 17세기 초기 괘불 24점

괘불 등장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밝혀낼 키는 1622년~1699년까지 제작된 초기 괘불 24점에서 찾아질 가능성이 크다. 충청도의 사찰에서 압도적(46%)인 11점(충북 3점, 세종특별자치시 1점, 충남 7점)이 제작되었으며 특히 1670년대 이전 14점 가운데에는 57%인 8점에 이른다. 다음으로 전라도와 경상도는 각 5점이다. 그 외 경기도 2점, 강원도 1점이다. 이처럼 초기 괘불이 제작된 사찰이 충청・전라・경상도에 집중되었다는 것은 임진왜란(1592년~1598년)의 집중적인 피해지역으로 그만큼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많이 발생한 시대 상황과도 맞물려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괘불, 야외전용 불화의 탄생

조선 후기에는 불전 앞에 괘불대를 세우고 괘불을 거는 방식이 보편화하는데 공양물 진설이나 '재齋'의 공간 중심이 불전 내부에서 앞마당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대규모 천도 의식이 활발히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된 괘불의 등장 배경과도 일맥상통하다. '괘불'이라는 새로운 '재齋' 형태의 종교 형상물은 양대 전란이 끝난 후 야외 의식(수륙재, 예수재, 영산재 등)의 필요성에서 등장한 '야외전용 불화'의 탄생인 셈이다.

괘불 등장 배경에 대한 비판적 접근

그동안 괘불의 발생 원인을 양대 전란 이후의 혼란한 민심이 종교에 귀의하여 생긴 일시적인 수요 증가와 절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보는 필자의 연구 이후 한 발짝도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임진왜란(1592년~1598년)・병자호란(1636년~1637년)이 끝난 후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제사하여 위로하고 추천追薦하는 수륙재와 같은 대규모 천도 의식이 활발히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가다듬어 추정해 왔을 뿐이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피해가 극심했던 임진왜란(1592년~1598)이 끝난 시점보다 괘불의 등장 시기는 24년이 지난 뒤라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 격차를 보인다. 나아가 병자호란(1636년~1637년)은 괘불 최초 등장 후 14년 뒤에 일어나는 점은 설명할 길이 없다.

이처럼 1636년 12월에 발생한 병자호란 전에 조성된 괘불의 사례도 기록상은 2개이고 실물은 3개나 된다. 기록상으로는'공산동화사사적기'에 의현義玄 스님에 의해 1620년에 조성된(1688년 개채改彩) 동화사 괘불과 1636년에 '송광사 개창비'에 극율克律 스님이 조성한 완주 송광사 괘불도 전해온다. 실물은 '죽림사세존괘불탱'(1622년)은 물론이고 무량사의 '미륵보살괘불탱도'(1627년), 칠장사의 '오불회괘불탱'(1628년)이다.

17세기 대기근 사회상

괘불의 등장 배경에 17세기 전반全般에 걸쳐 대재앙으로 번진 대흉년으로 인한 대기근의 사회현상이 무척 주목된다. 괘불 등장 초기인 17세기는 17세기 초반부터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평균기온이 하락해 농산물 생산량이 줄어들게 되었다. 17세기 소빙하기의 원인으로는 태양 활동의 후퇴가 지목된다. 17세기는 지금보다 유독 더 추웠는데 당시 태양 흑점이 극단적으로 감소했다. 17세기 후반에는 마운더 극소점(Maunder Minimum)으로 지목되는 흑점 활동이 가장 미약한 시기가 존재했는데 이것이 태양 활동의 약화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17세기 전반全般을 강타한 임란 이후의 최악의 대재앙이라는 대기근[병정대기근(1626년~1627년), 계갑대기근(1653년~1654년), 경신대기근(1670년~1671년), 을병대기근(1695년~1699년)]시기에 공교롭게도 괘불이 집중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초기 괘불이 제작된 사찰이 충청・전라・경상도에 집중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적 특성도 함께 엿보인다.

17세기 대기근과 괘불탱 등장 시기의 절묘한 일치

이처럼 17세기 대기근과 괘불탱 등장 시기가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일련의 경향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괘불탱의 등장 배경에 17세기의 대기근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임란 후 파괴된 사찰의 중창 불사를 추진해야 하는 불교계의 눈앞에 대기근과 역병에 굶주리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외면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왕조실록이나 유생들의 문집 어디에서도 그러한 불교계의 구휼 노력을 기록하는 문건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기록하지 않고 회피하고 싶은 이유도 짐작이 가기 때문에 그렇게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괘불재 후 음식을 나누어 먹는 법식은 구휼하던 습속

괘불재의 재의식이 끝난 뒤에는 제물을 고루 나누어 먹는 법식法食의 유습에서 17세기 대기근 때의 구휼救恤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고려나 조선 초기의 수륙재는 '무차법회無遮法會'라고 하여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고루 음식을 나눠주고 진리를 들려주는 오늘날 중국이나 대만 불광사 등지에서 행해지는 '만연수륙법회'의 성격이 짙다. 오늘날의 괘불재는 많이 간소화되고 사라져 가지만 30년 전까지만 해도 며칠 동안 주야로 끊이지 않고 범패와 의식 무용이 진행되었다. 어쩌면 그때의 기억이 그대로 괘불재의 법식法食에 고스란히 남아 전해지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괘불재는 어쩌면 일시에 집단적인 식사를 가능하게 하는 '사찰구시'의 등장 배경으로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사찰구시'가 발견되는 사찰에는 예외 없이 괘불이 조성된 것도 다른 이유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괘불재는 향도 집단 명맥이 이어 온 흔적

우리 조상들이 예로부터 거행해온 제천행사나 두레와 같은 마을 공동체의 향수가 괘불재를 낳게 한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강한 의구심을 떨칠 길이 없다. 특히 고려말 조선 초 향도香徒 집단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매향 의식이 임진・병자 양대 전란 후에는 괘불재로 그 명맥을 이어왔을 거라는 막연한 추정도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연장 선상에서 상상이 가능한 일이다.

2.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화기(1653년, 사진 문화재청)

3. 천은사 석가독존괘불탱(1673년, 사진 문화재청)

4. 도림사 석가삼존괘불탱(1683년, 사진 문화재청)

도림사 괘불탱 화기 1

도림사 괘불탱 화기 2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