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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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고인돌
  • 입력 : 2020. 11.19(목) 12:48
  • 편집에디터

화순군 벽송리 고인돌

고인돌은 '굄돌'을 놓아 만든 무덤이라는 뜻이다. 굄돌 위에 대형의 판석을 덮었으니 사실은 '덮은돌' 혹은 '누운돌'이라는 이름이 정확할지 모른다. 세운 돌을 '선돌', 한자말로 '입석(立石)'이라 한다. 세운 돌과 대칭관계를 이룬다고 봤을 때 서있는 돌과 대칭되는 개념은 '누운돌' 혹은 '덮은돌'이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으로 호명한다. 석붕의 붕(棚)이 시렁이나 선반 같은 것을 말하므로 '돌선반'이나 '윗덮개' 즉 '덮은 돌'에 의미를 둔 것으로 보인다. 'Dolmen'의 'men'이 돌이라는 뜻이고 'dol'이 탁석(卓石)이라는 뜻이니 테이블 모양의 돌 즉 이것도 위의 덮은 돌에 의미를 둔 호명 방식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위에 덮은 판석보다 밑에 고인 굄돌에 의미를 부여하는 '고인돌'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한자말 지석묘(支石墓)의 지(支)가 지탱하다 버티다 괴다 등의 뜻이 있으므로 이 또한 굄돌의 의미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의 분포가 세계적이라고는 하지만 그 거석들과는 다르게 왜 우리는 덮개돌보다 굄돌에 의미를 더 두었을까.

덮은돌과 고인돌, 한반도를 왜 고인돌의 나라라고 부를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니 고인돌을 한반도 특유의 묘제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풀이해두었다. 그런데 고인돌의 분포지역은 북유럽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유럽의 영국으로, 프랑스, 스위스와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지중해의 북쪽 연안지방,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와 중국의 복건성, 절강성, 산동반도, 요동반도, 길림성 남부를 거쳐 한반도 전역, 일본의 규슈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해있다. 거의 세계적이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해있기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지 않았겠는가.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하천유역의 대지와 낮은 구릉에 많이 축조되었다. 넓은 평야지대보다는 산과 구릉이 가까운 약간 높은 평지와 해안지대 등지에 많다. 시기적으로 보면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 무덤양식이다. 대개 유력자의 무덤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문제 제기 하나, 고인돌을 세계적인 거석문화의 하나로 보는 견해에는 이견이 없으나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 또는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 등을 한 그룹에 넣어 해석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광의의 맥락에서는 예컨대 누운돌이나 덮은돌의 개념이라면 돌멘(Dolmen)의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협의의 맥락 즉 '굄돌'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격이 다르지 않을까? 무덤의 구조로 봐도 한반도의 고인돌이 가장 확실하고 수량도 가장 많다고 한다. 고인돌은 함경북도의 일부 지방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특히 고창, 화순 등 남부지역에 유달리 많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많이 없어지거나 훼손되었다지만 아직도 15,000개에서 20,000여개가 남아있어 심지어 한반도를 고인돌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중 대부분이 남도에 있으니 바꾸어 말하면 남도지역을 사실상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러도 무방할까?

고인돌은 굄돌을 통해 만든 인조동굴이다

문제는 왜 그냥 덮지(덮은돌) 않고 돌을 고였(굄돌)을까 하는 점이다. 까닭이 있을 것이다. 땅에 있는 구조물을 이용하거나 평지 혹은 땅을 파고 돌을 덮으면 덮은돌 혹은 누운돌이 된다. 굄돌을 사용한 이유는 돌을 고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떤 환경 즉 판석과 굄돌간의 공간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굄돌을 괴면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은 지상으로부터 떠 있기도 하고 혹은 지표 아래 조성되기도 한다.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의 할아버지당을 사례 삼아본다. 쭈뼛쭈뼛 세운 거석들 위로 마치 고인돌처럼 판석을 덮은 형국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은 청동기시대의 잔존물을 후대에 마을당(堂)으로 삼은 것일까? 이런 형식은 서남해안 특히 섬지역에서 산견되는 '고려장' 혹은 '고린장'이라고 부르는 묘제에서도 발견된다. 하나같이 돌을 좌우로 쌓아 올리고 판석이나 흙을 덮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난 칼럼에서 옹장(甕葬)과 석장(石葬)의 아우라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게 보면 동굴의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의 지면을 통해 자연토굴에서 인위적 토굴로 이어지는 맥락을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같은 동굴의 이미저리는 고인돌에서 옹관으로 특히 아이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독장으로 이어져왔다고 본다는 점도 밝혀두었다. 이천년을 지나고서도 유독 아이들의 주검을 독담 혹은 독장 형식으로 처리하는 이유를 상기해보면 한편의 답이 주어질 수 있다. 주체세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선대는 고인돌로 후대는 옹관으로 장묘제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초분과의 관련은 차차 설명해나간다. 어쨌든 '굄돌'을 강조하여 고인돌이라 호명한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돌을 괴서 만든 인조동굴, 여기서 말하는 동굴은 자궁 모티프이며 고대인들의 생산관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즉 고인돌은 무덤 양식이면서 생산을 하는 재생의 동굴이기도 하다. 고인돌에 그려진 북두칠성이나 윷판바위, 불교의 관음설화는 물론 수많은 여음굴 설화들도 관련된다. 고대인들은 고인돌에 어떤 신화들을 투사하였던 것일까.

남도인문학팁

단군신화, 웅녀가 탄생한 동굴은 어디에 있을까?

동굴 관련 설화의 역사는 깊고도 넓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단군신화다. 이들 설화소는 남근바위와 대칭을 이루며 음양론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동굴 자체 즉 음기(陰氣) 만으로 출산 혹은 생산의 의미를 완성하기도 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 아래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천부인 3개를 받아 3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 태백산 정상에 내려왔으며 무리 3000을 거느리고 정상의 신단수 아래 '신시(神市)'를 열고 환웅천왕이 되었다. 3이라는 숫자를 주목하자. 단군신화 동굴의 삼칠일에 대해서는 대개 7일이 세 번 거듭된 날짜로 해석해왔다. 현재까지 전승되어온 세이레 습속에 착안한 해석이다. 예컨대 아이가 출생하면 7일째 되는 날은 초이레, 14일째 되는 날은 두이레, 21일이 되는 날을 세이레라 한다. 출입문에 숯과 한지 등을 끼워 넣은 왼새끼 즉 금줄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이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착안하면 이것이 세 번의 칠일임을 알 수 있다. 북두칠성을 상징 삼는 부족이 3이라는 숫자를 상징 삼는 세력과 연대했을까? 숫자 3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유익한 숫자로 이해되었던 점 불문가지다. 특히 동양권 예컨대 우실하에 의하면 몽골리안의 3이라는 숫자는 다시 그것을 3번 더하는 숫자 9를 최정점으로 여긴다. 불교의 장례기간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이 7을 다시 일곱 번 더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문제 제기, 그렇다면 웅녀가 태어난 동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난 칼럼에서 다룬 중국 지린성의 국동대혈이나 수많은 설화 속에 등장하는 천연동굴 곧 여음굴일까? 단군신화가 지극한 상징이고 비유라면 동굴 또한 지극한 상징과 비유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신약성경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동굴)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그렇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곳도 동굴 무덤이었다.

고창생물권보전지역의 고인돌유적지. 뉴시스

목포시 삼향읍 고인돌. 이윤선 촬영

신안군 장산도 고인돌. 이윤선 촬영

전북 위도 치도리 돌방무덤. 서해의 아름다운 섬 위도에서 발췌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 할아버지당 내부. 이윤선 촬영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 할아버지당 전경. 이윤선 촬영

오키나와 동굴무덤. 2007년 이윤선 촬영

중국 지린성 소재 국동대혈 동굴의 내부. 이윤선 촬영

중국 지린성 장군총 옆에 조성된 고인돌(동굴). 이윤선 촬영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