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아듀 경자년, '초꼬지불'을 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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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아듀 경자년, '초꼬지불'을 켜며
  • 입력 : 2020. 12.30(수) 11:24
  • 편집에디터

호롱불 아래서 천년 이야기 나눠요. 뉴시스

경자년 세밑 불현듯 초꼬지불을 켜고 싶었다. 향수를 달래자는 뜻만은 아니다. 한두 달 기다리면 좋아지겠거니 하다가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되어버린 아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에서는 '호롱'을 '초꼬지'라 한다. '초꼬지'의 표준말이 '초꽂이'이고 '호롱'이다. 촛불을 켜는 '꽂이'라는 말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꽂이'보다 더 넓은 의미이기 때문에 나는 늘 '초꼬지'로 표기한다. 한자말로 쓰면 등잔(燈盞)이다. 기름을 담아 등불을 켜는 데에 쓰는 그릇이다. '남포등'은 램프(Lamp)의 한자식 표기다. 남포등 비슷한 등을 '호야등'이라 한다. 박주가릿과의 상록 덩굴꽃 '호야'에서 온 말이다. 호롱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기나 유리 또는 양철 따위를 이용해 작은 병 모양으로 만든다. 아래에는 석유를 담을 수 있도록 둥글게 하고 위 뚜껑에는 심지를 해 박아 불을 켤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낸다. 이 구멍으로 한지나 실오라기, 헝겊 등을 곱게 말아 끼워 넣은 것이 '심지'다. 촛불은 물론이고 남포등, 호야등 모두 심지를 통해 기름을 끌어올리는 구조다. 심지의 본래 재료가 종이(紙)였기 때문에 '심지(深紙)'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국어사전에서는 '심(心)지'라 해서 본뜻을 밝혀두지 않았다. 마음에 품은 의지를 뜻하는 '심지(心志)'나 마음의 본바탕이라는 뜻의 '심지(心地)' 혹은 깊은 뜻이라는 '심지(深旨)'도 한자표기는 다르지만 컨텍스트는 같다. 모두 깊은 안쪽에서 기름을 끌어올려 등잔을 밝힌다. 근대기 이후 석유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석유초꼬지'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고기 기름이나 동백기름 등 식용유가 사용되었다. 예컨대 정어리기름이나 명태의 창자 기름 따위를 사용하는 것은 '어유등잔(魚油燈盞)'이다.

초꼬지 호롱에서 낙지호롱까지

초꼬지의 표준말 호롱은 호롱박에서 온 말이다. 1978년 개봉된 영화 <취권>을 보면 고수 원소전이 호롱박 술병을 허리에 차고 다닌다. '호리병'이라고도 한다. 위와 아래가 둥글고 가운데가 잘록한 모양이다. 바가지 밥그릇이란 뜻의 호로병(瓠盧甁)에서 온 말이다. 호리병의 형태는 영락없는 초꼬지다. 아랫부분은 넓고 둥글며 위쪽은 초꼬지의 뚜껑처럼 작고 쭈뼛하다. 호롱박은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풀이다. 줄기는 덩굴지고 덩굴손에 의해 다른 물체에 감아 붙는다. 잎은 어긋나고 심장 모양이다. 열매가 길쭉하게 생겼는데 가운데가 잘록하다. 한자로 표기하면 포로(匏蘆)다. 바가지를 만드는 '박'의 열매를 뜻하기도 한다. 남도지역에서 낙지를 꼬챙이에 꿰어 둘둘 말고 볏짚으로 싸서 구운 것을 '낙지호롱'이라 한다. 호롱박의 형태를 빌려 쓴 호명방식이다. 낙지의 머리가 호롱박처럼 둥그런 모양이고 발들이 얽혀있으니 덩굴에 비유한 셈이다. 포로, 호로, 호로병박, 호리병박 등이 같은 뜻이다. '조롱박'이라고도 한다. 조롱의 안쪽에 촛불을 켜면 초롱이다. '초롱'의 롱(籠)은 삼태기나 대나무로 만든 그릇 곧 대바구니다. 중국 동북지역이나 경북, 충청, 함경도 등지에서는 '새장'을 초롱이라 한다. 모두 둥그런 모양의 용기라는 뜻이다. 초롱은 촛불이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겉에 천 따위를 씌운 등(燈)이다. 혼인식을 할 때 사용하는 '청사초롱'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푸른 천과 붉은 천으로 상하단을 두른 형태다. 조선후기에 궁중에서 왕세손이 사용하였다. 청사등롱(靑紗燈籠), 정삼품부터 정이품의 벼슬아치가 밤에 다닐 때는 쓰던 품등이기도 했다. 신랑과 신부가 교배례 때 사용하던 술잔은 '조롱박잔'이다. 조롱박이끼, 조롱박세포, 조롱박오목 등 모두 호롱박의 형태를 본뜬 이름들이다. 초꼬지는 호롱박의 형태에서 여러 이름들이 생긴 등불과 이음동의(異音同義)이다.

한낮에도 등불 켜고 사람 찾는 세상

"사물 비추어 어둠 없애니/ 붉은 마음 본래부터 밝았네/ 홀로 방안에 낮 만들었는데/ 창밖엔 삼경이 지났네." 장흥사람 존재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고작 8살에 지었다는 영등화(詠燈火)이다. 밖에는 짙은 어둠 내려 삼경인데 어린 위백규 홀로 등잔불 밝히고 책을 읽는 풍경이 선연하다. 선조 때의 성여학(1557~?)은 또 이렇게 노래했다. "베개 베고 뒤척이다 밤중에 일어나/ 등불 심지 돋우고 생각에 잠기네/ 숲속 휑해져 바람 쉽게 지나가도/ 하늘 멀어져 기러기는 천천히 날아오네(후략)." 존재의 등불과는 사뭇 다른 고독과 기다림의 정조를 읊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코로나19로 험준한 세상 마치 삼경(三更)의 밤인 듯하다. 한 달이면 좋아지겠거니 하다가 그새 일 년을 넘기고 말았다. 모든 일들이 뒤죽박죽 꼬여버렸다. 정초에 예비해뒀던 일들이 차일피일 늦어져 해를 넘기는 황당한 심정 어찌 나뿐이겠는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허송해버린 일 년이 억울하기도 하다. 방안에 홀로 들어 초꼬지불 켜보자는 마음, 비대면과 언택트로 집안에 머물러야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망한 세월만 보내버린 자책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역병 들고 나는 것이 지금뿐이겠으며 시대와의 불화가 지금 뿐이겠는가. 다만 염려되는 것은 코로나도 버거운데 정치 과잉의 한파까지 덮친 점이랄까. 불현듯 스승도 없고 어른도 사라진 불온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회칠한 무덤에서 통성으로 외는 저자거리의 무리들은 많은데 호령하는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다. 한낮에도 등불 켜고 사람 찾는 세상, 뒷괴춤 붙들고 따라나설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가뜩이나 오른 집값 등 실패한 경제정책을 호통치고 극심하게 양분된 민심이반을 조율할 스승들이 그리 없는 것일까. 항용 인용하는 김구의 언설,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 정치 말고 문화 과잉의 시대를 살고 싶은 마음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로 지친 경자년 세밑, 여덟 살 순결한 존재 불러내어 내면의 초꼬지불 밝히는 마음 처연하다. 밖으로 들었던 촛불 거둬 이제는 내면의 초꼬지불로 나를 성찰할 시간이다. 삼경이 자시(子時)와 같으니 지나간 날과 새로 올 날의 경계, 새벽이 멀지 않은 까닭이다. 성경 출애굽기(27:20)는 이렇게 말한다.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잔불을 켜서 꺼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남도인문학팁

아듀! 경자년, 근하신년 제웅치기

'조롱'은 호롱박의 형태에서 온 말이기는 하지만 연말연시의 풍속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이 액막이로 끈이나 옷끈에 차는 물건을 말한다. 나무로 밤톨만하게 호리병 모양을 만들어 붉은 물을 들이고 그 허리에 끈을 매어 끝에 엽전을 단 형태다. 동짓날부터 차고 다니다가 이듬해 음력 정월 열 나흗날 밤에 제웅(허수아비)을 가지러 다니는 아이들에게 던져준다. 여자아이가 차는 것을 '서캐조롱'이라고 하고 남자 아이가 차는 것을 '말조롱'이라 했다. 이것이 제웅치기다. 한자말로는 타추희(打芻戱)다. 연전에 이 지면에 나후직성과 삼재(三災)를 소개할 때 언급했기에 간략하게만 메모해둔다. 악성(惡星)인 나후직성을 상징하는 짚 인형을 만들고 그 머리에 동전을 넣어 대보름 전야에 길에 버린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그 머리를 다투어 부수어 동전을 꺼내고 허수아비 몸뚱이를 땅에 두드리며 논다. 강원도에서는 '허수아비 버리기', 제주에서는 '도채비(도깨비)방쉬'라 하고 남도지역에서는 '허두새 버리기'라고 한다. 제웅(허수아비)은 무속의례에서도 활용되고 도서해안지역에서는 일명 띠뱃놀이로도 활용된다. 코로나 안고 가는 대신맥이,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새로운 기운 흰소의 해를 맞이하자.

전국 곳곳에 한파 특보가 내려진 30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광장에 설치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임시 선별검사소에서 한 의료진이 언 손을 온열기에 녹이고 있다.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