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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43>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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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43>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길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게재 2021-01-14 11:21:07
43-1. 중간스탬프가 있는 목화 휴게소 도로변에 널린 한치들.
43-1. 중간스탬프가 있는 목화 휴게소 도로변에 널린 한치들.

한때는 제주도가 외국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는 것, 과거의 나에게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16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해서 그해 겨울 올레길을 완주할 때까지도 그랬다. 낯선 동네(?)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서 느꼈던 두려움과 동시에 느껴지던 야릇한 설렘, 초보 '걷기'의 순수한 각오 같은 것들. 나는 제주올레 패스포트를 2년 전에 이미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언제 다시 걸어야지, 라는 막연한 다짐 때문이었다. 마침 코로나 바이러스19 여파로 해외 도보여행이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 좋은 기회였다. 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배낭을 꾸려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올레길의 역사

'올레'는 집 앞 대문에서 마을길까지 이어지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좁은 길'을 말한다. 제주도 방언이다. 지금은 걸어서 제주도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공식적인 도보 자유 여행의 상징이 되었다.

올레길 발상은 언론인 서명숙 씨에 의해서였다. 그녀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뒤였다. 2007년 9월 마침내 시흥-광치기(총15.1km) 제주올레 제1코스를 탄생시켰다. 2010년까지 총 22개 코스(총연장 350km)가 열렸으며 지금은 모두 26개 코스로 구성되어 길이가 425km에 달한다.

코스마다 거리가 다르지만 평균 10~20km 정도이다. 넉넉잡아 4~6시간 정도면 된다. 주로 해안을 따라 걷게 하다가 안쪽으로 살짝 들어가 마을길과 들판길을 맛보게 한 뒤 오름으로 안내한다. 어떨 때는 곶자왈이나 미술관 등을 들렀다가 다시 해안길로 되돌아오게 하는, 골고루 제주도를 밟게 하는 구성이다.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는 코스도 세 군데나 된다. 우도(1-1), 가파도(10-1), 추자도(18-1)가 그렇다. 도상 거리보다 더 여유 있게 km나 시간을 잡아야 한다. 이 모든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제주도 속살은 은근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매일 걷는다는 것은 그리 녹록하지 않은 작업이다. 완주해서 메달도 받고 올레 홈페이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사서 고생한다는 말을 실행해야 한다. 5년 전에는 순전히 배낭을 메고 숙소를 옮겨 다녔다. 체력이 모자라 밤마다 뭉친 근육 통증에 끙끙거렸다. 물집이 군데군데 잡혔고 발톱도 빠졌다. 예측 가능하면서도 예측이 어긋나는 제주도 날씨에 적응하지도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다. 판초를 걸쳐도 신발은 젖기 일쑤였다. 민박집에 머물렀을 때는 주인 눈치 봐가며 젖은 신발에 드라이어를 밤새 번갈아 돌리기도 했다. 어느 '해녀의 집' 식당에서는 현금이 없어서 쩔쩔 맸다. 신용카드는 있으나마나였다. 다행히 처음 본 옆자리 손님이 돈을 빌려주었다. 주인 있는 개가 주인 대신 나를 따라와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휑한 들판 한구석 승강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의 그 쓸쓸함이라니….

그동안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두 번(프랑스 길과 포르투갈 길) 다녀왔다. 이젠 '걷기' 선수가 다 됐다. 자신만만했다. 그 만만한 자신감은 제1코스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서귀포의 시작, 그리고 제주올레의 첫 마을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제주도는 제주(濟州)·정의(旌義)·대정(大靜) 등 3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시흥리(始興里)는 정의군에 속했고 당시 군수였던 '채수강'이 '맨 처음 마을'이란 뜻으로 '시흥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제주에 부임한 목사(牧使)가 제주를 둘러볼 때면 시흥리에서 시작해서 종달리(終達里)에서 순찰을 마쳤다고 한다. 그래서 시흥리가 올레길 첫 코스이고 종달리가 마지막 코스인 21인지도 모르겠다. 두 마을은 서로 손을 맞잡고 있으면서도 제주시와 서귀포시라는 다른 행정구역처럼 그리 가깝지만은 않다.

나는 첫날 시흥리에서 첫 스탬프를 찍고 중간 스탬프를 21코스 종점에서 찍고 말았다.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야하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서 처음과 끝만 장식했던 것이다.

시작은 산뜻하기만 했다. 제1코스 시작점인 시흥초등학교 앞에서 스탬프 박스를 발견한 것은 2020년 12월 28일 오전 9시였다. 햇살은 바다에서 방금 건져 올린 제주 은갈치처럼 빛났고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미리 준비한 올레길 패스포트 1코스 시작점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탬프를 찍고 말미오름으로 향했다.

말미오름 정상에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그곳에 오르기까지 현무암 까만 담 안에 푸른 무 이파리가 새파랗게 돋아있는 밭을 지나야 한다. 군데군데 당근 밭도 있었는데 수확하고 남은 당근이 황토 흙속에서 요염하게 붉은 몸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바다를 보며 말미오름 정상에서 환호성을 내질렀고 알오름을 오르면서는 예전에 우연히 마주쳤던 커다란 소 엉덩이에서 떨어지던 '그것'이 떠올라 마구 웃어댔다.

현재와 과거가 씨실과 날실이 되어 천을 짜는 듯한 시간들. 성산 갑문다리로 우회하지 않고 마지막 코스인 21번 코스로 걸어간 것은(종달항까지 2km를 더 가서 다시 되돌아와야 했기에 1시간 정도를 허비했지만) 가벼운 워밍업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빨랫줄에 빨래를 널어놓은 듯 길가에 한치가 걸려 있는 목화휴게소에서 제주도 생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는 농담처럼 중얼거릴 수 있었다. "한치가 쌀밥이라면 오징어는 보리밥이고, 한치가 인절미라면 오징어는 개떡이겠지(제주도 속담 변형)?" 약간 오른 취기를 무기 삼아 성산일출봉을 마주하고 식생 매트가 깔려 있는 광치기 해변 길에서 제1코스 종점 스탬프를 찍었을 때는 아련하게 밀려오는 안개 섞인 늦은 오후 햇살을 환상적으로 바라보았다.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다음날부터 연이틀 눈보라가 치리라는 것을.

걷는다는 것은 낭만적인 듯 하지만 두 발은 늘 땅을 밟아야 한다. 현실이다. 처음이든 두 번째든 열 번째든 늘 '현재진행형'이다. 매서운 날씨가 비로소 나를 과거에서 현실로 온전히 되돌려놓기까지 딱, 하루밖에 허락하지 않았다.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43-2. 말미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퀼트 모양 밭과 성산일출봉.
43-2. 말미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퀼트 모양 밭과 성산일출봉.
43-3. 말미오름 오르는 밭길. 올레 리본이 보인다.
43-3. 말미오름 오르는 밭길. 올레 리본이 보인다.
43-4. 알오름 오르기. 올레길 간세와 화살표.
43-4. 알오름 오르기. 올레길 간세와 화살표.
43-5. 스탬프 박스에서 올레길 패스포트에 스탬프 찍기.
43-5. 스탬프 박스에서 올레길 패스포트에 스탬프 찍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