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대낮에도 등불켜고 사람 찾는 세상' 얼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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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대낮에도 등불켜고 사람 찾는 세상' 얼척이 없다
귀태(鬼胎)||이대남 이대며 페미 따위의||계층 갈라치기로 재미를 보고||급기야는 장애인 권리까지||쟁점화하는 어지러운 세상||우리 시대는 귀태 도깨비||이야기로부터 얼마나||진보했는가, 혹은 퇴행했는가
  • 입력 : 2022. 04.21(목) 16:22
  • 편집에디터

백제시대 전돌, 부여 외리 문양전 중 산수귀문전-국립중앙박물관

"나의 친우 성번중의 집에 일찍이 귀신의 장난이 있었는데, 초저녁 종이 울릴 무렵에 은은히 서산의 수풀 속에서 나와 돌을 던지기도 하고 불을 붙여 와서 한 여종을 능욕하여 임신이 되었는데 마치 사람과 접촉하는 것 같았다. 민가에 이따금씩 이러한 환난을 만나는 수가 있으니, 의원들이 말하는바 귀태라는 것으로, 백방으로 막으려고 애써도 되지 않는다."

김안로가 지은 야담설화집 <용천담적기>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귀태설화(鬼胎說話)라고 한다. 흔히 얘기하는 도깨비 이야기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를 '두려워하고 걱정함' 또는 '나쁜 마음'이라고 풀이해두었다. 홍나래는 귀태를 이렇게 분석한다. "귀태 이야기 속 주인공은 아비 없이 태어났다는 소문과, 나자마자 세간의 비웃음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아이들이다. 그는 철이 들면 마을에 머물 수 없는 존재이거나 특출한 사명을 지고 가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서사에서 완곡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이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넘어 논란이 된 여성에게 삶의 이유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 짓는다. "귀태란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실현되던 사회에서 성적 피해 여성과 그 가족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로 기능했던 것이다(홍나래, <조선시대 귀태 소재 설화의 문화사회학적 의의와 한계>(2014)." 그 사례로 <매일신보>의 기사를 소개한다. "불사의의 망량촌 도깨비마을(1913), 경성의 독갑이 이것이 무엇인가(1914), 심야비석 독갑이 작란인가(1915), 방화범 아가애녀, 독갑이 작난으로 알엇던 불이 실상은 자긔집 딸의 소위이다, 십이세 소녀의 변응적 심리(1923), 독갑이 작난인가 사람의 소위인가(1924), 독개비에게 홀려 불노핫다고 의문의 방화광여자공판(1926)"등이 그것이다. 1900년도 초부터 1920년대까지 도깨비를 독갑이로 호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망량, 독갑이, 독개비 등도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다. 혼외혼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랄까. 제목만 늘어놔도 당시의 상황이 짐작된다. 이런 측면을 졸저 <도깨비로 보는 한국 사회문화사,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할미디어, 2021)>에서 자세하게 다루어 두었다.

귀태설화, 아버지 없이 출생한 아이들

"아계 이산해(1538~1609)라는 조선시대의 재상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선조시대에는 팔대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분이다. 이산해의 이버지 이지번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산해관에서 잠을 잤는데 부인과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 이지번의 부인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남편과 동침하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 집안에서는 이를 의심하여 부인을 내치려 하였다. 이산해의 삼촌 토정 이지함이 만류하였다. 귀국한 이지번이 자신의 꿈을 말하여 부인의 결백이 입증되었다. 꿈꾼 곳의 이름을 따서 '산해(山海)'라 이름 지었다. 그래서인지 대낮에도 이산해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대동기문>에 실린 이야기다. 도깨비의 시원으로 거론되는 삼국유사 비형랑설화도 사실은 죽은 왕과 통정해서 낳은 아이의 이야기다. 일종의 귀태설화다. 졸저를 좀 더 인용해둔다. 이 이야기에는 악귀나 코믹한 버전의 캐릭터들이 뒤섞여 있다. 때로는 돌을 던져 창문을 부수거나 솥뚜껑을 솥 안으로 집어넣었다 빼내는 요술도 부린다. 철을 능숙하게 다룬다는 대장장이가 도깨비의 시원으로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집안 담장을 무너뜨린다든지 화재가 났다든지 창문을 누군가 깨트렸다면 그것은 모두 도깨비짓이다. 불도깨비의 현현이라고나 할까. 집안에 불을 내는 존재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재를 예방하는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유익함을 제공해주는 재복신과 거리가 있지만 긍정적 성격이라는 점은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민담류의 도깨비와 식자층이 기록해두었던 한자 용어의 도깨비들(이매나 망량 등)을 보통 도깨비의 이중성 혹은 양가성으로 해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면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뜻이겠다. 그만큼 도깨비는 핑계 댈 수 있는 적절한 대상이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독특한 존재다. 도깨비가 없으면 어쩔뻔했을까?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도깨비의 현현은 만능처럼 보인다.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현실을 보다 교묘하게 도깨불에 투사했던 귀태설화가 기능해온 측면이기도 하다. 아버지 없이 출생한 아이들은 모두 도깨비의 자녀들로 묘사되는가? 그렇지 않다. 한편으로는 매우 거시적이고 출중한 출생 비밀로 포장되고 급기야 동정녀 잉태의 단계로 추앙되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은 기분 나쁘겠지만, 적어도 남녀의 직접적인 결합 없이 신기하게 발생한 임신 사건의 알고리즘은 예수 탄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 이래 꿈속 교합이라는 몽교(夢交), 햇빛이나 달빛, 죽은 남자의 영혼에 의한 감응으로 전개된 수많은 신화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상기해보라. 탯줄 없이 태어난 신비한 출생을 고대의 건국설화에서부터 수도 없이 접해왔지 않는가. 귀태에 대한 사회사적 맥락은 이렇듯 천차만별이다. 고대의 탯줄 없이 태어난 영웅들로부터 조선 후기 아버지 없이 잉태한 아이들, 또 남편 없는 여자들에 대한 보호 이야기를 거쳐 비로소 우리는 거대한 생명문화를 담론화하는 시대의 입구에 다다라 있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우리 시대는 귀태 도깨비 이야기로부터 얼마나 진보했는가. 혹은 퇴행했는가. 대낮에도 활보하는 귀태스런 이들을 보며 드는 생각들이다.

소치 채씨효행도 병풍 9면 귀화전도 부분확대

남도인문학팁

대낮에도 활보하는 귀태 도깨비

2003년 김지하 등이 참여하였던 <생명문화포럼>에서 이미 이렇게 정의하였다. "현대 서구사회를 유형 지어 왔을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나 중대한 영향을 미쳐온 서구근대주의는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 신념, 인간 신체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 생존을 위한 투쟁처럼 사회에 있어서도 무한경쟁의 생활관, 물질적 진보에 대한 신념, 남성들의 여성 억압을 자연법칙으로 강제하는 신념 등의 사상과 가치를 포함한다." 근자에 일부 무리가 이대남 이대녀 패미 따위의 계층 갈라치기로 재미를 톡톡하게 보고, 급기야는 장애인의 권리까지 쟁점화하는 모습을 본다. 우리 고향 말로 하면 '얼척'이 없다. 사람의 사회는 아랫돌과 윗돌이 대칭하여 돌아가는 것인데 '어처구니'가 없으니 어찌 맷돌을 돌릴 수 있으랴. 이른바 소수 약자를 포섭하는 개념의 여성성 혹은 주의는 그렇게 단순한 이해관계로 해석될 만큼 천박하지 않다. 가부장제의 오랜 역사 속에서 자연과 여성, 어린이와 장애인, 외국인 근로자, 성소수자까지 예컨대 '에코페미니즘' 등으로 수식되는 지난한 투쟁의 역사요 각성의 행로였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다 자라도록 나와 맞상을 하지 못하셨다. 오로지 흰쌀밥 맞상은 아버지와 나, 이른바 가부장으로서의 남성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우리는 일시적인 굴절과 퇴행을 거치며 진보해왔다. 이 피와 땀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가? 귀태의 비슷한 말로 '음모(陰謀)'가 있다. '나쁜 목적으로 몰래 흉악한 일을 꾸미거나 또는 그런 꾀를 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묻는다. 우리의 기성체제는 서구 중심의 거대자본과 과학기술의 폭력성, 서구 백인 남성들을 미러링한 것인가? 귀태 도깨비 난무하던 조선 후기의 폐습을 상속한 것인가? 대낮에도 등불 켜고 사람 찾는 세상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