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 역사이야기>절명시 4수로 민족 자존 일깨운 선비, 매천 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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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 역사이야기>절명시 4수로 민족 자존 일깨운 선비, 매천 황현
조선의 마지막 선비, 광양 출신 매천 황현||이건창·김택영과 함께 구한말 三才라 불려||갑신정변 이후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귀향후 저술활동, 호양학교 건립 후학 양성||1910년 망국의 통한에 절명시 남기고 자결||구례에 매천사, 광양에 매천 역사공원 설립
  • 입력 : 2022. 07.27(수) 09:49
  • 편집에디터
매천의 초상화, 그 자체가 역사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黃玹, 1855~1910),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그의 얼굴만으로 충분하다. 얼굴은 그가 살아온 그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황현의 제자 김상국은 「매천 선생 묘지명」에서 황현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체구는 작으나 정갈하고, 이마는 넓어 얼굴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고, 눈은 틀어진 듯하나 번개 치듯 빛나며, 사람을 볼 때 안광이 하늘에 비치고, 수염은 용과 같이 가볍고 시원스럽게 펼쳐진 듯하였다." 김상국이 쓴 묘지명은 매천의 외모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정신세계를 헤아리게 해 준다.

황현의 인물 사진 두 장도 남아 전한다. 삶을 마감하기 직전인 1909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서 해강 김규경이 운영하는 사진관 '천연당'에서 찍은 것이다. 한 장에는 테두리 오른쪽에 친필로 '매천 55세 소영(梅泉五十五歲小影)'이라 쓰여 있고, 다른 한 장에는 '매천거사 55세 소영'과 함께 인생을 되돌아 본 그의 자작시가 남아 있다. 자작시의 마지막 구절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평생 가슴 속에 불만만 쌓았는가?"에는 비판적 선비로서의 회한이 담겨 있어 가슴이 찡해진다.

황현의 사진에 남겨진 자작시나 김상국이 묘사한 외모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 당대 최고의 화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다. 채용신은 고종과 면암 최익현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1911년 5월, 황현의 사진을 보고 갓 대신 정자관을 씌워 그린다. 채용신의 황현 초상화는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곧은 성품도, 나라 잃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선비의 절개도 잘 표현된 수작이다.



벼슬에 꿈을 접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 이건창·김택영과 함께 구한말 삼재(三才)라 불린 광양 출신 매천 황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

황현은 1855년(철종 6),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서석 마을에서 황시묵과 풍천노씨의 맏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장수, 자는 운경이며 호는 잘 알려진 것처럼 매천이다. 세종대의 명재상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청병사 황진 등이 그의 선조다. 11세 되던 해에 구례로 유학하여 왕석보의 문하가 된다. 왕석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직전 결성된 비밀결사 성진회의 핵심 인물이었던 왕재일의 증조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쳤으며, 특히 시와 문장에 능통했다. 17세 때 순천영(順天營)의 백일장에 응시하여 호남 전역에 이름을 떨친다. 1875년(고종 12), 서울에 올라와 이건창에게 시를 추천받아 당시의 문장가이며 명사인 강위·김택영·정만조 등과 교유한다. 특히 이건창과 김택영은 그 후 스승과 친구 사이로 평생 버팀목이 된다. 29세 되던 1883년 별시 문과 초시에 1등으로 뽑히지만, 시험관이 그를 시골 출신이라 하여 2등으로 내려놓자 복시를 포기하고 귀향한다.

1886년 구례군 간전면 수평리 만수동 마을로 이사한 후 학문에만 전념하다 아버지의 뜻에 못 이겨 34세 되던 1888년 식년시 소과인 생원시에 응시, 1등으로 뽑혀 성균관 생원이 된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껴 정치인을 '귀신같은 나라의 정신 나간 사람(鬼國狂人)'이라 질타하고 벼슬에 꿈을 접는다.

한양과 절연한 그는 1890년 만수동에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편안히 지낼만하다"라는 뜻의 서재 구안실(苟安室)과 삿갓모양의 정자 일립정(一笠亭)을 짓는다. 선비의 절의를 상징하는 매화나무를 심고, 매화나무 곁에 조그마한 우물을 만들고 매천(梅泉)이라 이름 붙인다. 황현은 그 매천을 자신의 호로 삼는다.

구안실에서 3,000여 권의 서적에 파묻혀 두문불출하며 학문 연구와 저술, 후진 양성에 전념한다. 이때 쓰인 책이 그 유명한 『매천야록』, 『동비기략』 등이다. 1,000여 수의 시를 썼던 곳도 만수동이었다.



근대 호양학교를 설립하다

황현이 평생 붙잡았던 학문은 공맹(孔孟)의 도였다. 그러나 황현이 살았던 시절 큰 흐름은 신학문이었다. "하늘이 변하지 않듯 도(道) 또한 변하지 않는다"고 보았던 매천도 신학문의 실용적 가치를 인정한다. 이는 제자 김상국이 쓴 매천의 「묘지명」에 나오는 "내 나이 너보다 많으나 서양의 후생(厚生)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방법을 배워 쇠한 우리나라의 시국을 구하는데 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라는 말속에 잘 묻어난다.

이러한 매천의 입장이 반영되어 실천된 것이 그가 순국하기 2년 전인 1908년 광의면 지천리에 건립된 호양학교(壺陽學校)다. 매천은 스승인 왕석보의 후학 및 지천리의 유지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그의 제자였던 박태현, 왕수환 등은 교원이었다.

사립학교 운영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제의 방해와 탄압도 문제였지만, 더 어려운 현실은 교원들의 월급 등 재정난이었다. 호양학교 설립과 운영을 위한 재정은 지천리 주민들의 전답과 현금 등 출연에 의지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에 매천은 의연금을 모금하기 위해 '사립호양학교 모연소(募捐疏)'라는 글을 쓴다. "생각건대, 호양학교 건립의 노고는 진실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외부로부터의 방해를 물리치매 이미 온갖 재난의 고역을 겪었고, 경영에 힘을 다 바쳤으나 ……옥을 쪼다 그친 듯 어린이들을 가르칠 방도가 없으니 안타깝고, 교원들에게 급여를 못 주게 되니 선생 노릇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의 모연소는 체면을 벗어던진 절박한 호소였다. 황현이 순국한 후 호양학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다 1920년 문을 닫고 만다.



절명시 4수와 유언을 남기다

황현인 순국하기 직전 남긴 절명시 중 제 4수는 다음과 같다. "내 일찍이 나라를 지탱하는데 조그만 공도 없었으니/ 오직 인(仁)을 이룸이요 충(忠)은 아니로다/ 겨우 윤곡(尹穀)을 따를 수 있음에 그칠 뿐/ 때를 당하여 진동(陳東)을 따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노라"

시에 나오는 윤곡과 진동은 송나라 사람이다. 윤곡은 거란의 군대가 담주성을 포위하자 자결하였고, 진동은 국정을 문란케 한 간신들을 탄핵하다 참형 당한 인물이다. 윤곡과 진동, 둘은 죽음의 방법이 다를 뿐 스러져 가는 나라에 목숨을 던진 절의의 대표로 후세에 회자되는 인물이다.

그로부터 800여 년 후인 1910년 9월 10일(양력) 황현은 절명시 4수와 더불어 다음의 유언을 남기고 자결한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10여 일 만이었다.

"내가 가히 죽어 의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으나 국가에서 선비를 키워온 지 5백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 어찌 가슴 아프지 아니한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관리가 되어 녹을 먹지 않았던 황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조선 왕조가 멸망했다고 해서 반드시 죽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500년 동안 선비를 우대하고 양성했던 나라에서 망국의 슬픔을 가슴에 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가 한 사람도 없음을 통탄한다. 그리고 자신이나마 선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의연히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매천이 순국하자 경남일보 주필이던 장지연은 1910년 10월 11일 '사조(詞藻)'란에 매천의 순절 소식과 절명시 4수를 싣는다. 매천의 순절이 알려지자 만해 한용운은 '곡황매천(哭黃梅泉)'이란 만시(輓詩)를 짓는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죽음으로 민족의 자존을 일깨운 매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그리고 그해 그가 순국했던 광의면 월곡마을에 그를 기리는 매천사가 설립된다.

그가 태어난 광양에는 '매천헌'이란 편액을 단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매천 역사공원에는 그의 묘소가 잘 다듬어져 있다. 1886년부터 1902년까지의 거처지였던 구례 간전면의 구안실은 그가 떠난 후 불에 타 폐허가 되었고, 그의 호가 된 샘 매천은 흔적만 남아 있어 안타깝다. 그가 1902년부터 마지막을 보낸 구례 월곡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매천사가 있고, 사랑채였던 순국의 방 '대월헌(待月軒)'이 복원되어 있다. 오동나무 아래에서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썼다는 오동나무는 지금도 남아 매천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구례 읍내 서시천 공원에는 왕재일과 함께 그의 동상이 서 있다. 황현은 오늘 구례를 상징하는 인물이니 그의 동상은 당연하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