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서홍원> 셰익스피어의 명 독백(8) 여성을 바라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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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유전자·서홍원> 셰익스피어의 명 독백(8) 여성을 바라보는 눈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 입력 : 2022. 09.21(수) 17:23
  • 편집에디터

서홍원 교수.

"나약함, 그대의 이름은 여성이다" (햄릿)

셰익스피어의 명 독백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에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자주 말했다. 위에 인용한 햄릿의 여성혐오적인 견해나, 데스데모나의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면한 오델로의 광기와 집착 등을 통해 여성을 바라보는 눈이 대체로 부정적임을 지적한 바 있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시기의 크리스토퍼 말로우(Christopher Marlowe)가 쓴 〈파우스투스 박사(Doctor Faustus)〉에서 주인공 파우스투스는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 얻어낸 힘으로 트로이의 헬렌을 소환한다(헬렌 본인이 아닌 영혼을 빨아먹는 악마가 헬렌으로 분신하여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파우스투스가 말한다.

이것이 일천 척의 배를 출정시키고 끝없이 높은

일리움의 탑들을 불타게 했던 얼굴인가?

'팜므 파탈', '경국지색' 등 여성의 아름다움의 파괴성을 표현하는 말은 이제 클리셰가 되어 있다시피하다. 헬렌의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3권에서 잘 묘사된다. 전쟁 초기, 트로이 성벽 앞에 도열한 그리스군을 내려다 보며 프리암왕은 적장들을 파악하기 위해 헬렌을 성벽 위로 부른다. 계단을 오르는 헬렌을 보면서 원로들은 입을 모아 "이해가 된다"고 말한다. 헬렌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은 후대의 원망을 초래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파리스와 같이 트로이로 온 헬렌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황금사과를 놓고 경합을 벌였던 여신들, 명예와 지혜를 놔두고 사랑을 선택한 파리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수 많은 동료들을 전쟁터로 몰고 온 메넬라우스를 놔두고 토로이 멸망의 책임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은 서양문화의 특징이자 문제점이다.

시간이 지나 중세에 와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괴로움을 선사하는 것으로 변하기까지 한다. 중세 프랑스에 〈수레의 기사〉라는 작품이 있다. 기사 란슬롯(Lancelot)은 납치된 아더왕의 부인 귀네비어(Gwenevere) 여왕을 구출하기 위해 뒤쫓다가 말을 잃고 소달구지를 타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소달구지는 당시에 중범죄를 지은 사람을 호송하는 운반도구였기 때문에 이것을 탄다는 것은 명예에 타격이 될 수도 있지만 란슬롯은 깊이 고민하지 않고 오른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온갖 모욕과 폭력을 받지만 이를 묵묵히 견뎌낸 란슬롯은 여왕을 구출하게 된다.

그러나 여왕은 그에게 쌀쌀하기만 하다. 그 이유는 소달구지를 타기 전에 란슬롯이 순간적이나마 주저했던 것이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다. '기사 로망스'의 여성은 이렇듯 절대적인 복종을 기사로부터 요구하는데, 죽을 수도 있는 기사 간의 결투에서 귀네비어가 란슬롯에게 패배를 명하는 일이 그렇다.

이런 이상적이지만 이상하기도 한 남녀의 관계상은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의 연애시로 옮겨지게 되고 그때 탄생하는 것이 전에 말한 바 있는 '페트라르카적인 여인'이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의 소네트를 통해 그려지는 여인은 여신처럼 아름답지만, 중세 기사 로망스의 귀네비어 여왕처럼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냉혹한 여성이기도 하다.

본 지에 소개했던 소네트가 있는데, 얼굴의 홍조로 사랑을 드러낸 남성이 사랑을 숨기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여성의 분노를 사고, 그의 홍조는 금세 창백한 안색으로 바뀌어, 그를 부추겼던 사랑이 가슴 속 깊은 숲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 독자도 계실 것이다.

페트라르카적인 여성은 유럽의 르네상스를 지배했으며 그 결과는 여성에게는 참혹했다. 아름답지만 차갑고 이성적이지 않은 여성은 남녀 사이의 틀어진 관계에 대한 대다수의 책임을 져야 했다. 냉혹한 여성의 변덕을 감내하는 남성이 반대로 요구한(그러나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은) 여성에 대한 잣대는 "여신이 되라"는 것이었으니.

그래서 오델로의 폭력은 여신의 아름다움을 지닌 데스데모나가 여신의 정결함을 저버렸다고 오해한 데서 그러난 것이다.

명분이 있음이야, 명분이 있어, 내 영혼아 –

그 이름을 대지 않게 해다오, 너희 정결한 별들아! –

명분이 있음이야.

또다른 셰익스피어의 작품 〈겨울 이야기〉에서는 군주 레온테스(Leontes)가 부인 허마이오니(Hermione)를 의심하여, 그녀는 죽게 되고 그녀가 낳은 딸 퍼디타(Perdita·잃어버린 아이를 뜻함)는 타지로 유배된다. 극의 결말에 레온테스는 (사실은 죽지 않았던) 허마이오니가 석상처럼 서있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이미 자신의 과오를 뉘우쳤지만, 부인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군주의 모습에서 오델로에서 목격한, 그리고 페트라르카적인 여인상에 내재된 여성에 대한 비정상적인 잣대의 잔혹함을 엿볼 수 있다.

그 어떤 섬세한 끌이

숨결을 깎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할 것이니 그런다고 날 비웃지 말라.

결국 '되살아난' 허마이오니와 레온테스는 화해를 하고 행복하게 살 듯 보인다. 오델로의 비극과 레온테스의 희극 사이의 차이는 간단하다. 오델로는 먼저 사랑하다 의심하게 되어 데스데모나를 죽였고 레온테스는 먼저 의심하다 사랑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어 허마이노니와 재결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십수년도 넘게 입은 허마이오니의 상처는 어쩔 것인가….

영화 '트로이' 속 한 장면.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의 아내인 헬레나를 데리고 오는 모습. 네이버 영화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