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호남 의병장 동상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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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호남 의병장 동상 건립
  • 입력 : 2022. 10.11(화) 15:13
  • 이용규 기자
이용규 논설실장


광주 남구 광주공원에는 호남의 대표적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가 있다. 1972년 결성된 순절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심남일 의병장의 순국 충절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했다. 지난 4일 함평 월야면 달맞이문화센터에서는 심남일 장군 순국 112주년 추모식이 열려 장군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렸다.

심남일은 함평 월야면 정산리 신기마을에서 태어나 서당 훈장을 하던 1907년 11월1일 을사늑약에 분개해 의병으로 나섰다. 두 아들과 세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는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했다. 기삼연 장군 주도로 규합한 호남창의회맹소는 함평출신 선봉장 김태원, 김율 형제 등의 활약으로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강력한 의병부대였다. 그러나 1908년 2월 기삼연 장군이 체포, 광주천변에서 총살된데 이어 그 해 3월 그의 상관이었던 김율이 체포되고 4월에는 김태원 의병장 마저 어등산에서 전사하자 호남창의회맹소는 와해 지경에 처했다. 사방에 격문을 보내 흩어진 의병들을 불러 모아 독자부대를 구축한 그는 수택이었던 이름도 전남 제일의 수장의 의미로 남일로 바꿨다. 이 때가 1908년 2월이다. 민간에 민폐 금지와 엄격한 군율로 주민 신뢰를 얻은 심남일 부대는 필묵상을 하다 의병에 합류한 강무경과 함께 전남 중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일본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심남일 장군은 당시 일본 군경이 작성한 '전남폭도사'에 기록된 8대 거괴 중의 한 명이었다. 일본이 거론한 8명의 거괴는 3기로 구분되는데, 1기 거괴에는 호남창의회맹소에 소속되지 않았으나 한말 의병운동에 불을 지핀 순창 출신 면암 최익현, 창평 고광순, 장성의 기삼연이고, 2기 거괴는 김태원(준), 김율 형제, 3기는 임실 출신 전해산(수용), 심남일, 보성 출신 안규홍 등을 말한다. 장군은 일본군의 대대적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쫓기다 10월9일 화순 능주에서 신병 치료 중 일경의 습격을 받고 체포됐다. 일제가 '현재 폭도중에서 가장 교활한 자'라 일컫던 심남일의 체포는 호남 의병이 막을 내린 것과 같았다. 광주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장군은 '왜적과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한이요, 노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두번째 한이며 죄없는 의병이 갇혀 있으나 구해 주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요. 죽은 후에 순절한 충신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 네 번째 한'이라고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대구감옥으로 이감된 장군은 1910년 10월 4일 죽음을 맞았다.

구한말 의병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선 의인들이다. 선비는 붓을 놓고 총을 잡았고, 농민은 곡괭이, 쇠스랑을 들고 일어섰다. 의병은 사거리 30m에 불과한 화승총으로 당시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대항했다. 일본군의 총은 6발의 실탄을 장전할 수 있고 사거리가 200m되는 최신식 무기였다. 하늘과 땅차이인 화력은 결과적으로 일본 순사 1명을 죽이는 데 의병 136명의 희생이 뒤따랐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도 나라가 국민을 버렸지만, 초개처럼 목숨을 내던진 민초들의 의병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횃불처럼 타올라야 한다. 전남도가 추진하는 나주 혁신도시 의병공원에는 호남 8대 의병장들의 동상이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 끈질긴 저항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한 기삼연 장군의 동상을 그의 고향 장성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오는 31일 한말 호남의병 추모제를 앞두고, 언필칭 "의병정신" 운운이 공허하고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아울러 광주·전남지역의 거리 이름도 8대 의병장을 비롯해 지역 출신 의병장 이름으로 바꿔가야 한다. 남도인의 자랑스런 의병 정신은 박제화된 무용담으로 머물러선 안된다. 의병정신은 말이 아닌 생활속에서 살아 숨쉬도록 해야한다. 이용규 논설실장



이용규 기자 yonggyu.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