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彌勒)의 팬덤은 흙수저들이다. 혁명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미륵이 현생할 때 차별 없는 유토피아가 온다는 게 미륵신앙이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이들이야 먹고살 걱정 없지만 흙수저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아예 갈아엎자는 염원을 주머니 속 비수처럼 품고 산다. 삼국이 그랬고 고려와 조선, 구한말도 그랬으며 반상(班常)의 구분이 사라졌다지만 지금도 다르지 않다.
도사가 되고자 했으나 영발이 서지 않아 매설가(賣說家)가 됐다는 조용헌 교수의 해석에 의하면 '彌勒'을 파자(破字)하면 '이(爾) 활(弓)로 힘(力)을 길러 바꾸자(革)'가 되고 미륵불의 본거지는 변산이다.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장광(長廣) 80리 변산반도는 수백 산봉우리가 마치 미로와 같아서 못 살겠다 갈아엎자는 노비와 하층민이 도망쳐와 살았다고 한다. 관과 추노꾼들이 닿기 어려워 흙수저들에게 미륵을 꿈꾸는 유토피아 언저리였다는 것. 부안 변산 호암(壺巖·병바위) 일대는 난세를 피해 살기 마땅하다는 '정감록'의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변산에 있는 슈퍼급 미륵불이 바로 동학과 얽혀있는 고창 선운사 마애불이다. 흙수저들의 히어로였을 이 미륵불 배꼽 속 비결(祕訣)을 꺼내면 한양이 망한다고 했는데 1820년 깜냥도 안 되는 전라감사 이서구가 비결을 꺼냈더니 "이서구가 열어본다(李書九開坼)"고 적혀있어 혼비백산 줄행랑을 놨다. 1892년 비결은 마침내 흙수저들 손에 들어갔으니 이른바 후천개벽(後天開闢), 1860년 경상도 경주 사람 최제우가 불 댕긴 동학이 1894년 전라도 고창 사람 전봉준이 중심 돼 엄청나게 폭발했다. 하지만 미완의 혁명, 미륵은 오지 않았다.
4세기 불교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미륵신앙은 민간설화와 얽혀 지명과 산 이름, 절 이름에 흔적이 남아있고 절집마다 미륵전도 흔하다. '서동요' 주인공인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러브 스토리 설화'가 있는 익산 미륵사지가 대표적인 미륵신앙 사찰이고 도처에 남은 불상은 김제 금산사나 논산 관촉사처럼 대부분 표나게 큰데 또 하나 돌로 깎은 게 특징이다.
일제가 콘크리트를 부어버린 만행을 저지른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이 보수공사 20년 만에 완벽하게 복원됐다. 우리 사회는 어쩌다 '김학의, 장자연, 버닝썬은 특권층 강간문화'라는 말까지 나왔다. 미륵을 자처한 후고구려 궁예처럼 관심법(觀心法)을 들이대 피라도 봐야 한단 말인가. 아, 석탑은 돌아왔으나 미륵은 아직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