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진도군 고군면 내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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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진도군 고군면 내동마을
  • 입력 : 2019. 08.29(목) 12:28
  • 편집에디터

진도군 내동마을 풍경

일본 교토(京都)에 '코무덤'이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조선에서 얼마나 야만적이고 잔인하게 굴었는지 보여주는 증표다. 일본군은 당시 조선사람들을 죽이고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가져갔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여겼다.

코무덤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무덤이 있다. 진도에 있는 왜덕산이다. 명량대첩 이후 바닷가로 밀려온 일본군의 시신을 거둬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 공동묘지다. 왜군들한테 덕을 베풀었다고 왜덕산(倭德山)이다. 하나의 전쟁에서 각기 다른 두 개의 무덤이 탄생한 것이다. 극과 극이다.

총칼을 겨누고, 가족과 이웃을 죽인 적군의 시신을 거둬 묻어준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자리에서 두 발로 짓이기고, 다시 한 번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말이다. 일본의 수입규제 조치로 엇나가기 시작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때마침 명량대첩 422주기도 앞두고 있는 요즘이다.

진도로 간다. 왜덕산이 자리하고 있는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내동마을이다. 마음 한없이 넓은 진도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슴 뭉클한 곳이다. 반성과 사죄는커녕 적반하장으로 달려드는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다.

진도대교를 건너 왼편으로 만나는 진도타워에서 잠시 쉬어간다. 타워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가 울돌목이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일본군을 초토화시킨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울돌목은 한양으로 올라가려던 일본군이 반드시 거쳐 갈 수밖에 없는 길목이었다. 울돌목의 수로는 길이 2㎞에 이른다. 폭은 가장 좁은 곳이 300m 남짓이다. 물살의 속도가 최대 11.5노트(시속 22㎞ 안팎)로, 물길에서 무척 빠른 편에 속한다. 유속이 빠르고 바닥이 거칠어 물 흐르는 소리가 20리 밖에서도 들린다는 험한 해협이다. 급류가 서로 부딪혀 울면서 소리를 낸다고 지명도 '명량(鳴梁)'이다.

때는 1597년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백의종군하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이 전라도 일원에서 조선수군을 재건한 직후였다. 조정의 지원을 받기는커녕 수군 철폐령까지 내려지는 악조건 속에서다.

이순신 장군은 장수와 병사들을 모아놓고 역설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이다(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 必生則死).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일부당경 족구천부, 一夫當經 足懼千夫)'.

이순신 장군의 공격 명령과 함께 조선수군 함대가 적선으로 돌진하며 포를 쏴 올렸다. 군관들은 함선 위에 줄지어 서서 화살을 쏘아댔다. 조선수군의 일제 공격에 일본군은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겁 없이 다가온 일본군들이 당황해하더니 어찌할 줄을 몰랐다. 조선수군은 그 틈을 이용해 일본군의 배에 불을 붙였다.

중천에 떠있던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간조였던 바닷물이 만조로 역류했다. 바닷물의 흐름이 조선수군에 유리해졌다. 승기를 잡은 조선수군은 크고 작은 화살을 모두 적선으로 쏘아댔다. 일본군이 혼비백산했다. 일본군이 타고 있던 배가 물속으로 속속 가라앉았다. 사망자가 수천을 헤아렸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배들은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선수군의 승전가가 울려 퍼졌다.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잃은 제해권을 두 달여 만에 다시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짜릿한 대역전승, 13척으로 일군 승리였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대승이었지만, 진도사람들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명량대첩에서 승리한 조선수군이 당사도까지 빠져나간 뒤, 일본군이 다시 몰려왔다.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죽였다. 울돌목에서의 패배에 대한 분풀이였다.

그로부터 여러 날이 지났다. 내동마을 앞바다로 일본군의 시신들이 파도에 떠밀려 왔다. 마을사람들은 일본군이었지만, 마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시신을 한 구씩, 모두 100여 구를 거둬 마을 앞 산자락에 묻어줬다. 햇볕이 잘 들면서도 일본 쪽을 바라볼 수 있는 남쪽의 산자락이었다. 지금의 왜덕산이다.

산 앞으로 펼쳐진 들녘은 당시 바다였다. 일제강점기 때 간척이 이뤄진 탓에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마을 앞 바닷가는 예부터 귀신이 많이 나왔다고 '도깨비골'로 불렸다. 맞은편 지막리와 지수리 사이에는 포구가 있었다. 바닷물이 들어오고 배가 드나들던 곳이라고 '배드리'다. 지금 자동차가 다니는 산 아래, 마을 앞 도로는 수레가 다니던 신작로였다. 당시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의 오랜 관습이었다고 봅니다. 항상 죽음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연고가 없는 시신일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거든요. 일본군이라는 생각보다는, 바다에서 죽은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먼저였을 겁니다. 바닷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주검에 대한 존중이죠. 주검을 수습하지 않으면 나중에 자신이 해를 입는다고도 믿었고요."

'인지상정'이라는 이만진(70) 내동마을 이장의 말이다. 진도사람이 아니더라도 바다와 갯가에 기대 사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라는 얘기다. 평소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었으면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마을 옆 왜덕산에는 30여 기의 무덤이 남아있다. 풀이 많이 자라고, 칡넝쿨로 뒤덮여 있어서 언뜻 무덤인지조차도 분간하기 어렵다(명량대첩축제 전에 벌초를 할 예정이라고). 그 옆으로 농작물이 심어진 밭이 잇대어 있다. 밭에는 고추, 대파가 심어져 있다. 배추도 보인다.

"제가 짓고 있는 밭입니다. 예전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었죠. 이 밭을 개간할 때 사람의 뼈가 무지 많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무덤이 30여기 되는데, 그 옆 숲에 100여 기가 더 있어요. 예전에는 그래도 관리가 됐는데, 방치된 이후 지금은 거의 숲으로 변해버렸어요."

왜덕산에서 만난 마을주민 이무진(60) 씨의 말이다. 이 씨는 왜덕산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고 이기수(8년 전 작고) 씨의 아들이다. 산자락에 이기수 씨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씨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논밭을 일구며 틈나는 대로 왜덕산을 살피고 있다.

내동마을에는 현재 35가구 50여 명이 살고 있다. 50살 이하 젊은층이 절반을 웃돈다. 바다에서 전복과 김 양식을 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양배추를 2모작으로 하고, 부지화도 재배하고 있다. 한·일관계가 꼬일 대로 꼬인 지금 찾으면 더욱 애틋한 내동마을이다.

이돈삼 / 여행전문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내동마을회관

진도군 내동마을 풍경

진도군 내동마을 풍경

진도군 내동마을 풍경

진도군 내동마을 풍경

진도군 내동마을 풍경

진도군 내동마을 풍경

진도군 내동마을과 왜덕산앞 들녘

진도군 내동마을과 왜덕산앞 들녘

명량대첩축제 해상전투재현 모습.

명량대첩축제 해상전투재현 모습.

명량대첩축제 해상전투재현 모습.

왜덕산과 내동마을

왜덕산과 내동마을

왜덕산과 내동마을

왜덕산과 내동마을

울돌목 물살체험

울돌목 물살체험

울돌목 물살체험

이만진 내동마을이장

이무진 내동마을주민

진도타워

진도타워

진도타워에서 내려다본 진도대교와 울돌목

진도타워에서 내려다본 진도대교와 울돌목

진도타워에서 내려다본 진도대교와 울돌목

진도타워와 조형물

진도타워와 조형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