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3>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3) 왜구의 침략과 기근에 억울하게 희생된 혼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강설과 음식을 베푸는 수륙재 전문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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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3>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3) 왜구의 침략과 기근에 억울하게 희생된 혼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강설과 음식을 베푸는 수륙재 전문 특
  • 입력 : 2020. 02.20(목) 13:06
  • 편집에디터

1. 부석사 무량수전 내부 바닥 전돌(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8년)

사찰 불전 내부 바닥 소재, 전돌(方塼)에서 마루로의 변화

요즘 사찰 불전들의 내부 바닥은 모두 마루(抹樓)로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불전도 그러했다. 하지만 시대를 좀 거슬러 올라가면 봉정사 극락전(12∼13세기)이나 수덕사 대웅전(1308년),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 등과 같은 고려후기 불전에는 모두 전돌이 깔려 있었다. 조선전기에 들어와서도 무위사 극락보전 건립 초기 당시인 1430년에는 바닥이 전돌이었다. 그 뒤 불과 46년이 지난 1476년경에 갑자기 마루를 설치하게 된다. 그동안 조선시대 마루 설치의 시기에 대해 16세기 말과 17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보편화 되었다고 피상적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전기 몇 안 되는 불전 사례 중 봉정사 대웅전과 개심사 대웅전도 건립 당시부터 마루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내부 바닥은 마루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사진(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8년)에서는 바닥에 장방형의 전돌이 깔려 있었다. 지금도 건물 외부에는 무위사 극락보전처럼 기단 위에 짙은 검은색의 장방형의 전돌이 깔려 있다.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정방형 녹유전은 무량수전 이전 건물의 전돌(통일신라)로 알려졌다. 봉정사 극락전 내부 바닥에도 전돌이 깔려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 전돌 위에 마루를 설치하였다. 귀퉁이에서 바닥 전돌을 확인 할 수 있다. 외부 바닥은 전돌이 아니고 강회다짐이다. 수덕사 대웅전 내부 바닥도 마루 밑에 전돌이 깔려 있음이 확인되었다.

17세기에 중건된 화엄사 각황전이나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도 바닥에 전돌을 깔고 그 위에 가설 마루를 따로 설치했다. 화엄사의 경우는 화재로 소실된 장육전의 잔재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백제 미륵사지 금당지나 신라 감은사지 금당지에서 보이는 마루를 깐 구조의 유구는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다. 익산 미륵사처럼 저습지라는 주변환경 때문에 누마루식으로 밖에 건립할 수 없거나 감은사처럼 금당 밑으로 물을 통하게 해야 하는 특별한 건립 목적에서 비롯된 특수한 사정이 반영되었다.

이러한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고 조선전기 이전까지는 불전 내부 바닥에 예외없이 흙으로 구운 보도블럭 같은 네모난 모양의 방전(方塼)을 깔아 놓았다. 그러다가 조선전기부터 마루가 등장하면서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보편화 되었다. 불전 마루는 인도나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 등 불교문화권역의 어느 나라 사찰건축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한국 건축양식에서 자생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마루, 불전 개방화와 군집성이 탁월한 장소로의 실용적 바닥 소재

전돌은 차갑고 먼지가 많이 발생하는 입식 생활의 산물이다. 거기와 비교해 마루는 사계절 동안 거주성이 우수하고 청소가 쉬울 뿐만 아니라 전통 가옥의 대청마루에서 유래했으며 좌식 생활에 유리하다. 이와 같은 불전 내부 바닥재가 전돌에서 마루로의 변화는 불전 내의 실용성이 강조되는 획기적인 사회상이 반영된 것이다. 마루의 특성은 실내 활동 편리성뿐만 아니라 거주성이 강조되는 측면이 있기에 장시간 머물러야 하는 불전 내부 공간의 활용 변화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후는 사계절이 뚜렷하다. 기온은 여름에는 높고 습기가 많으며 겨울에는 낮고 건조하고 연교차가 심하다. 그러한 계절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 전통주택건축에서는 일찍부터 온돌과 마루를 도입하였다. 온돌은 취침 공간으로 이용되면서 폐쇄적인 특징을 보이지만 마루는 대청으로 이용되면서 개방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마루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불전의 마루 설치는 불전을 개방화를 의미하며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군집성이 탁월한 장소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실용적인 바닥 소재이다.

마루 모양도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하는 장마루가 아닌 우물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이다. 장귀틀(長耳機)과 동귀틀(童耳機)로 뼈대를 세우고 동귀틀 옆에 길게 홈이 파서 마루청판(抹樓廳板)을 끼워 마감한다. 사계절이 뚜렷하여 건조나 수축이 심한 한국적 기후에 적합한 마루형식이다. 나무가 말라 마루청판 사이가 벌어지면 마루를 다 뜯지 않고도 한 장 한 장 촘촘히 밀어 넣은 다음 빈 곳에 한 장을 더 보강해 넣으면 되는 효율성이 높은 바닥 소재이다.

수륙사 지정 후 극락보전 내부 개조 - 불법 강설 공간 거주성 확보를 위한 마루와 음식 진설용 불탁형 불단의 창출

이처럼 마루가 보편화 되기 전인 조선전기에는 전돌이 등장했다가 곧바로 마루로 바닥 소재가 변화하는 특별한 사정이 발생하였다. 그동안 전돌에서 마루로의 불전 바닥 소재의 변화를 단순히 엎드려 절하는 풍조가 일반화된 조선시대 예배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다분했다. 하지만 왜 그러한 예배방식이 변화되었지도 의문이고 절하는 풍조가 갑자기 왜 유행하는지에 대한 사회적인 배경도 밝혀내지 못했다. 해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인 무위사 극락보전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바닥 소재의 변화에는 불단의 개조나 후불벽・우물천장・보개형 닫집의 설치 못지않게 획기적인 변화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극락보전 불단을 개조하는 시기인 1476년경은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직후이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 의례인 수륙재를 효율적으로 지내기 위해 극락보전 내부를 일부 개조한 것과 밀접한 연관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영혼과 아귀(餓鬼)에게 불법을 강설(講說)하려면 계절에 관계없이 참여자들이 장시간 동참해야 하는 좌식생활 공간을 불전 내에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재의(齋儀)에 음식을 올리려면 큰 규모의 불탁형 불단도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불단과 바닥이 획기적인 형태로 개조되는 일대 대변혁기를 맡게 된 것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내부 바닥은 원래 전돌(方塼)이 깔려 있었다.

1958년 이전 무위사 극락보전 수리공사에서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밑바닥을 살펴보니 원래 전돌(方塼)이 깔려 있었던 구조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 증거로는 5개의 전돌 파편을 발견한 점을 들었다. 다음으로 마루 귀틀*을 기둥이나 하방*에 홈 구멍을 파서 끼어 고정시키지 않고 귀틀 밑에다 잡석을 괴여놓고 청(廳)높이를 유지한 것에 그친 점으로 미루어 마루 자체가 건립 당시의 것이 아니라 뒷날 추가해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귀틀: 마루를 놓을 때 굵은 나무를 가로세로 짜 놓는 틀, *下枋: 벽의 맨 아래쪽 기둥 사이를 가로지른 나무)

불단 위에 직접 세워진 후불벽의 벽 기둥도 대들보 위에 위치한 대공*의 첨차*에 긴 쇠못으로 박아 고정되어있는데 미리 후불벽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계획적으로 첨차를 잘라 둔 것이 아니라 다 완성된 후에 그것도 단청까지 끝낸 후에 갑자기 후불벽의 기둥을 세우기 위하여 잘라낸 것이라고 한다.(*臺工: 들보 위에 세워서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 *檐遮: 주두, 소로 및 살미와 함께 공포를 구성하는 기본 부재로 살미와 반턱맞춤에 의해 직교하여 결구되는 도리 방향의 부재) 이는 건물 준공 후 시간상으로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에 후불벽이나 불단과 함께 마루가 가설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근거라는 것이다. 전돌(方塼)에서 마루로 변화된 시기는 불단의 바닥이 마룻바닥과 같은 높이로 개조되어 있어 수륙사로 지정되어 불단을 개조하던 시기인 1476년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내부 전돌(方塼)의 행방을 찾아서

봉정사 극락전이나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은 지금은 마루가 가설되었지만 그 밑에 전돌이 그대로 깔려 있다. 하지만 무위사 극락보전은 1476년경에 마루로 교체될 때 1430년 건립 당시부터 깔려 있던 전돌(方塼)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글쓴이도 최근에 무위사 논문을 쓰기 위해 자주 방문하다 보니 건물 외부에 깔린 고식 전돌이 눈에 들어오고 1958년 수리공사 보고서에서 전돌을 표현한 도면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보고서에는 5개 분량의 전돌 파편만 언급되었지 나머지 전돌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전돌의 행방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살펴보다가 극락보전 건물 바깥쪽 네 면 기단 위 바닥에 깔린 전돌이 심상치 않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1958년 보고서의 극락보전 평면도에서 건물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전돌 크기의 방형 격자를 아무런 설명 없이 그려놓았다. 이는 아마도 현재의 상태와 같은 외부에 깔린 전돌을 바탕으로 내부에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도면이다. 그 이유는 외부 격자만 1958년 당시에 깔린 전돌을 표현한 것이고 마루 밑에는 전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지만 1958년 보고서에 건물 내・외부 평면도에 빼곡히 그려진 방형 격자 모양의 전돌 표현을 보고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건물 외부 사면 기단 상부 바닥에 남북 면에 5줄씩, 동서 면에 4줄씩 모두 760개 분량의 전돌(가로 27㎝, 세로 27㎝)이 깔려 있다. 1958년 보고서의 극락보전 평면도에서 건물 내부 전돌 크기의 방형 격자를 계산해 보니 988개이며 이 가운데에서 불단의 크기인 70개를 제외하면 918개이다. 또 초석 주변의 불완전 형태의 전돌 26개도 제외하면 896개로 현저히 줄어들어 외부에 깔린 전돌 760개와 그 개수가 대체로 유사하다. 물론 네모난 방전(方塼)이 극락보전 건립 초기인 1430년부터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내・외부에 함께 깔렸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사라진 918개 분량의 전돌의 행방을 설명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현 단계에선 내부 전돌을 걷어내서 외부에 깐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그나마 합리적이다. 이는 봉정사 극락전 외부가 강회다짐 바닥인 것처럼 불전 내・외부에 전돌이 동시에 깔리지 않은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극락보전 외부 기단 위 바닥의 전돌은 극락보전 건물 조성 당시인 1430년에 제작되어 내부에 깔렸다가 1476년경에 마루로 교체될 때 걷어내서 외부 기단 위 바닥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전돌을 유심히 살펴보면 제작연대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질 것 같다. 건물 앞쪽인 남쪽 면에는 비교적 상태도 양호하고 옅은 검은색의 사질 점토로 이루어진 전돌이 깔려 있다. 동서북쪽 면에는 일부 바탕색이 짙은 검은색의 전돌이 일부 섞여 있으며 남쪽 면보다 훨씬 많이 파손되어 있다. 이는 겨울철 동파의 결과로 여겨된다. 파손이 심한 전돌은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그 시기는 사질토가 섞이지 않은 짙은 점토로 제작된 전돌로 미루어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세 시기에 걸쳐 나누어 칠해진 단청이 의미하는 뜻

2009년 단청문양 모사도 작성 사업 중 닫집 우측 상부에서 1526년 초파일(4월 8일)에 단청을 칠했다는 '嘉靖五年丙戌初八日丹靑畵' 먹글씨가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단청도 세 번으로 나누어 칠해진 시간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물천장 위쪽의 1526년 이전 단청(제3단청)과 우물천장 아래쪽의 1526년 이후 단청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1526년 이후의 단청은 현재 대부분의 부재에 베풀어져 있는 단청(제1단청)과 목부재를 교체하면서 새롭게 도채한 고색단청(제2단청)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제1단청이 1526년에 조성되었으며 제3단청이 불전 조성 직후인 1430년경에 조성된 것이다. 제2단청은 1476년 후불벽화가 조성될 때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채색된 시기가 다른 것은 극락보전 후불벽화 조성을 위한 내부 기둥과 우물천장과 보개형닫집 등의 개조와 연관성이 깊다.

2. 부석사 무량수전 녹유전(남북국시대, 부석사 성보박물관)

3. 부석사 무량수전 외부 바닥 전돌(

4. 봉정사 극락전 내부(사진 황호균)

5. 봉정사 극락전 내부 바닥 전돌

6. 봉정사 극락전 외부 바닥 강회다짐(사진 황호균)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