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④(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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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④(完)
  • 입력 : 2020. 03.05(목) 13:52
  • 편집에디터

1. 무위사 극락보전 우물천장과 보개형닫집(사진 문화재청)

연등천장에서 우물천장으로 옮겨가는 과도기로 국내 최초 사례

천장은 대청마루 천장처럼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 (椽燈天障)'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불상을 모시는 불단 위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 만든 '우물천장'을 마련하여 먼지 등으로부터 불상과 진설 음식을 보호하려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천장 형식이 일부 가미되었다. 특히 불상 머리 위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는 일체형 목가구식(寶殿形)으로 독립된 지붕 모양의 '보궁형(寶宮形)닫집'이 아니라 천장 일부를 감실처럼 속으로 밀어 넣은 '보개형(寶蓋形)닫집'을 우물천장 사이에 설치하여 이른바 '보개천장'을 완성했다. 이러한 불단과 닫집의 형태변화는 독존불 위주에서 삼존불로의 협시불을 등장시키는 불단 공간의 확장성에서 기인하며 아미타불 신앙에만 그치지 않고 지장과 관음보살 신앙의 유행에서도 그 배경이 찾아진다.

우물천장과 보개형 닫집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도 건물 준공 당시 것이 아니라고 한다. 1958년 수리공사 보고서에는 "우리나라 주심포집은 보통 우리가 대청마루에서 보다시피 특별히 천장을 만들지 않고 지붕 밑의 가구재와 서까래까지를 드러낸 소위 연등천장의 수법을 취한다. 우물천장은 당초의 조영 계획에는 들어있지 않았는지 건물이 일단 완성된 후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에 추가해서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천장을 가설함으로써 가리워지게 된 종보(宗樑)나 마루대공 내면까지 단청(丹靑)을 칠하여 일단 완성시키고 있는데서 분명히 그러한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불단 상부에서만 우물마루처럼 장귀틀(長多欄)과 동귀틀(童多欄)을 격자로 짜서 가운데 반자청판(斑子廳板)을 끼운 우물천장을 구성하고 그 안에 보개형닫집(보개천장)을 마련했다. 이러한 부분 우물천장 형태는 고려시대의 연등천장에서 조선시대의 우물천장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형태로 조선 초기인 1476년경에 개조한 무위사 극락보전에서만 공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귀중한 사례이다.

판장문과 살창에서 사분합문 창호로의 변화한 첫 사례

창호는 현존하는 4동의 고려시대 불전들 가운데 봉정사 극락전과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경우 어칸(가운데 문)은 '판장문'이고 양협칸은 '살창'이다. 그리고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은 현재 정면 어칸과 양협칸이 모두 '분합문'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후대에 보수한 것으로 조사 당시에는 봉정사 극락전과 같은 판장문과 살창 형식이었다.

이러한 창호의 형태는 내부 공간에 빛을 공급하는 창과 내부에 벽화를 그리는 것과 관련성을 가진다. 불전 자체를 폐쇄적인 용실(龍室)로 만들던 고대 이래의 전통은 살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바닥에 반사되어 어두운 내부 공간에서 은연중에 불상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계획된다. 살창은 불전 내부의 채광과 통풍의 기능이 특히 부각되는 장치이다. 그러나 조선전기에 이르면 판장문과 살창이 사라지고 분합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위사 극락보전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 이런 구성은 조선전기 불전인 개심사 대웅전과 봉정사 대웅전에서도 등장하며 이후 조선 전역으로 보편화 되어갔다.

분합문 등장 가장 이른 사례로 '들어 열 개' 형식 사분합문은 필요시 개방 공간으로 변모

건물의 앞면은 격자모양・빗살모양을 섞어 만든 '4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았고 옆면에는 앞쪽에 출입살문, 뒷면에는 칸마다 모두 판자문과 창을 달았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고려시대의 판장문과 살창이 사라지고 분합문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가장 이른 예이다. 이러한 사분합문은 대청마루나 누각・정자 등에서 방한용으로 달았던 문에서 흔히 보이며 '들어 열개'라는 특징도 가지고 있어 불전이 필요시 마당까지 공간을 확장하는 개방적인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게 해준다.

사분합문, 괘불재 유행으로 '들어 열개'에서 '옆으로 열개' 형식으로 변화

건물을 만든 처음부터 분합문이 설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들어 열개'의 사분합문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다시 '옆으로 열개' 형태로 개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옆으로 열개' 분합문의 유행은 괘불재가 빈번해지는 조선 후기의 사찰 의례상 마당까지의 공간 개방 의미보다는 문 본연의 기능인 출입과 채광에 더 치중한 결과로 이해된다. 불전 정면 앞에 괘불이 세워지는 괘불재 의례 형태는 마당과 불전 건물 내부가 괘불에 의해 공간적으로 차단되어 굳이 '들어 열 개' 분합문 형태가 더는 필요 없게 되었을 것이다.

불탁형 불단의 출현과 불단 위치 뒤쪽으로 이동하는 이주법 성행

조선전기 불전 내부 공간은 공양물 진설을 위해 보조단을 설치하는 '불탁형 불단'이 출현했고 불단의 위치도 예불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뒤쪽으로 이동하는 '이주법'이 성행했다. 바닥마감은 거주성이 높아서 장시간 머물 수 있는 마루 설치가 보편화 되었다. 창호의 형태는 정면 대부분 흙벽 사이에 좌우 양협칸 살창과 중앙 어칸 판장문을 최소한으로 두는 고려시대에 비해 모두 문으로 바뀌는 등 개방적인 공간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특징들은 조선전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이후 조선 후기에 보편화 되었다.

'불상을 안치하는 공간'에서 '의례용 공간'으로 내부 공간 기능 변화

조선전기 불전에서 마루・사분합문・불탁형 불단・불단 이주법의 등장은 고려시대의 '불상을 안치하는 공간'에서 '의례용 공간'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곧 불전 내부 공간 기능의 변화를 말해 주는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시기에 비해 불전 내부에서 행해지는 의례가 빈번해졌다. 그것은 여러 단으로 나뉜 보조단을 두고 격식에 맞는 공양물을 진설할 수 있는 불탁형 불단의 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불전의 내부는 일반 신도들이 좀 더 효율적으로 의례를 행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즉 의례가 야외에서 실내로 옮겨짐에 따라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했고 따라서 불단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마루가 등장했다는 것은 앉아서 오랫동안 머물러야 하는 의례나 강설(설법)을 위주로 하는 행사 등이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많은 신도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필요시 모든 창호를 개방시킬 수 있는 분합문 형태도 찾아냈다.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영산재 등의 추천재(追薦齋) 성행

조선전기에는 지속적인 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일반 신도들의 신앙적인 측면에서만 겨우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찰들은 생존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고려 시대의 국가 주도아래에 이루어지던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대규모의 불교행사 대신 일반 신도들을 위해 야외인 중정(中庭)이나 불전 내부에서 행해지는 소규모 의례들이 성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일반 신도들을 위해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영산재 등의 추천재(追薦齋)가 빈번하게 행해진다. 수륙재는 물이나 육지에 떠도는 고혼과 아귀에게 법식을 공양하는 법회로 망자의 명복을 비는 추천재 성격이였으나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와 석왕사 관음굴 등에서 고려 왕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로 베풀어졌다. 태종이 1403년에 천재를 소재(消災)하기 위해서 수륙재로 베풀었으며 태종 8년에는 태조의 병이 위독하여 덕방사에서 수륙재가 열렸고 문종 1년에는 전염병을 퇴치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행되었다. 세종 11년에는 기신제(忌晨祭)와 칠칠재(七七齋) 역시 수륙재로 간소화하여 수륙재의 본질적인 목적에 벗어나 다양한 성격을 가지며 억불정책의 시행 중에도 국가공식의례로 법령화되었을 정도로 성행했다.

수륙재 전문 특화 공간으로서 실용성 강조

조선전기 억불정책의 시행으로 인해 사찰들은 재정적인 어려움과 종파들이 통합되어 산지로 쫓겨나는 등 여러 가지 상황들에 직면하게 되면서 사찰건축의 입지는 산지화되었다. 또한 지형적인 제약으로 공간이 협소해져 사찰이 소규모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이전의 질서 정연한 가람 구성에서 여러 건물이 간략화되는 변화를 보였다. 따라서 사찰은 주불전과 승방만으로 이루어진 가람 구성이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 불전이 복합적인 기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이 시기에는 불전 내부에 있어 이전과 다른 변화들이 나타나 주목된다.

왜구에게 희생된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강설과 음식을 베푸는 수륙재 전문 특화 불전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배경에는 억불정책이나 산지화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고려말 조선 초의 잦은 왜구들의 침략으로 인한 종교적인 해결책으로 수륙재가 봉행 되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수륙재 전문 특화 공간으로서 기능적 측면에서 실용성이 강조되었던 결과로 생각된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는 강진을 포함한 전남 해안 일대에 왜구로 인한 피해가 매우 컸다. 이로 인해 강진의 고려청자 산업기반이 내륙으로 분산 이전되었다. 전남 서남해안 중 특히 신안과 진도・완도는 왜구의 침범이 빈번해짐에 따라 섬의 주민을 육지로 옮겨 살게 하는 공도화(空島化)정책 시행하게 되었다. 또한 1407년에 천태종계열의 도강(道康) 무위사와 함께 조계종 계열의 자복사로 선정된 탐진(耽津)의 만덕사가 그해 왜구에 의해 불타버린 일도 있었다.

내부 공간 확장 배경에 인구 증가 밀접한 관련, 왜란과 호란 같은 양대 전란 이후에 등장하는 괘불 발생과 일맥 상통

특히 내부 공간의 확장 배경에도 조선시대의 인구 증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인구 증가와 임진왜란(1592)・정유재란(1597)・병자호란(1636)과 같은 양대 전란 이후에 등장한 괘불의 발생(죽림사 괘불 1622년)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많은 예불자를 수용하기 쉽게 하려고 불전을 개조하거나 괘불을 발생시켰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무위사에도 1678년에 괘불지주(康熙十七年/戊午日刻字/造成也)가 세워지는데 이 시기는 극락보전(1430년) 불단을 개조(1476년경)한 지 202년이 지난 뒤의 일이고 병자호란이 끝난 후 42년이며 괘불이 발생한 지 56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현존하는 괘불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예는 1622년에 조성된 죽림사세존괘불탱(보물 제1279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후 억울하게 죽은 혼령을 구원하기 위한 대규모 천도 의식이 활발히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100여 점이 조사되었을 정도로 대유행을 하게되었다. 괘불은 대규모 인원들과 의식을 공유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등장한 '야외 의식 전용 불화'이다.

홍매화 만발한 무위사

무위사에서는 홍매화가 활짝 피었다는 향기롭고 따뜻한 봄소식이 들려온다. 남녘 강진 성전을 지날 일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라. '무위사 극락보전'은 충남 예산 '수덕사 대웅전' 아래로는 가장 오래된 고건축물로 마루와 분합문, 우물천장, 불탁형 불단, 불단 이주법이 등장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590년의 세월 속에 다져온 '고풍(古風)'스러움이 건물을 휘감고 돈다. 네 차례의 연재로도 다 전하지 못한 내용은 이어지는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에서 조금 더 아쉬움을 달래보자.

2. 봉정사 극락전 전면 창과 문(중앙 어칸 판장문, 양협칸 살창, 사진 황호균)

3. 무위사 극락보전 전면 사분합문(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4년 이전)

4. 봉정사 극락전 불단(12∼13세기, 사진 황호균)

5. 수덕사 대웅전 불단(1308년, 사진 문화재청)

6. 부석사 무량수전 불단(1376년, 사진 문화재청)

7.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불단(1430년 이전, 사진 문화재청)

8. 봉정사 대웅전 불단(1435년, 사진 문화재청)

9. 무위사 극락보전 불단・불상・후불벽화(1476년, 사진 황호균)

10. 개심사 대웅전 불단(1484년, 사진 문화재청)

11. 무위사 극락보전 분합문 및 괘불지주(사진 황호균)

12. 무위사 극락보전 괘불지주(1678년, 사진 황호균)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