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인생 최고의 실수를 저질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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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인생 최고의 실수를 저질렀지만….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 입력 : 2020. 04.09(목) 13:11
  • 편집에디터
24-1. 시리아 출신 약사 M.


1) 앗, 비행기를 놓쳤다!

"어떻게 너는 그것을 착각할 수가 있니?"

M이 내게 물었다.

"요즘 날짜 감각이 없어. 뭐,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뭐."

나는 그의 질문에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지만 오늘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M을 만나기 한 시간 전이었다. 휴대폰에서 이스라엘 예루살렘 인근에 예약한 숙소 알람이 떴다. 예약 날짜가 오늘이었다. 실수할 내가 아니었다. 불안한 마음에 비행기 출발 일을 확인했다. 월요일 13시 30분이었다.

앗, 오늘이 월요일이잖아?

알고 났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한 시간 안에 짐을 꾸려 공항으로 출발할 수는 없었다. 공항으로 가는 시간만도 40분이나 되었다. 나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준 것은 내가 머물고 있던 숙소 여주인 태도도 한몫했다. 오전 내내 나는 휴게실을 서성거리면서 여유를 부렸는데도 그녀가 체크아웃을 해야 한다느니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느니, 라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비행기를 놓친 것을 알고는 하루 숙박 요금을 더 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에야 그녀는 수줍게 웃기만 했다.

"그렇다면 이제 너는 어떻게 할 거니?"

나보다 더 걱정이 많은 M은 항공 예약 확인 인쇄지를 내밀면서 물었다.

암만 올드시티에서 인쇄기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전날에야 알았다. 특급 호텔에나 가야 있었다. 항공 예약 확인증은 이미 메일에 저장되어 있지만 보안 수속이 까다로운 중동에서 사소한 한 가지라도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다. 완벽하게 준비해야 했다.

약사로 근무하는 그에게 인쇄를 부탁했다. 약국은 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 모든 약국에는 인쇄기가 없다고 했다. 인쇄를 할 수 있는 카페가 한 군데 있긴 한데 여행객에게는 바가지를 씌울 수 있다면서 자신이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낙담하는 내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의 수고로움을 쓸데없는 노력으로 만들고 있었다.



2) 비행기 대신 버스



3일 전, 페트라 캔들 나이트에서 베두인 공연을 보고 나올 때였다. 내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다가왔던 베두인이 계속해서 따라온 일이 있었다. 밤새 축제를 하는데 함께 참여하자는 거였다. 강하게 거절했기에 여느 남자처럼 적당히 따라오다 말겠지 싶었다. 그런데 이 양반 나보다 더 끈질겼다. 촛불만 켜진 어두운 협곡 길이었다. 어떻게 떼어낼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앞서가던 건장한 독일인 두 명이 걸음을 늦춰주었다. 베두인은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는 돌아섰다.

나를 도와준 그들과 페트라 입구 시크를 빠져나오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다음날 버스를 타고 이스라엘로 간다고 했다. 여행지 순서가 나와 같았지만 나는 3일 뒤나 비행기를 타고 갈 계획이었다. 육로보다는 항로가 더 안전할 거라는 판단에 이미 한국에서 항공편을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순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의 마음이 무의식을 점령했을까. 정말, 한 줌의 의심도 없이 비행기를 놓친 지금 M에게 미안할 정도로 짜릿하기까지 했다.

일사천리로 이스라엘로 가는 방법을 찾아내기는 했다. 먼저 요르단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만났던 우버 택시 기사인 아멘에게 전화를 했다. 대강 상황을 전하고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그곳까지 택시로 갈 수 있는지, 그렇다면 경비는 얼마나 되는지 등을 물었다.

한 시간 사십오 분 정도 사해 쪽(King Hussein Bridge)으로 달려야 하는데 택시비는 25디나르(약 5만 원)라고 했다. 비행기 요금보다는 쌌기에(비행기는 편도 40만 원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8시에 숙소 앞에서 만나서 출발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M을 만나기 위해 나섰던 거였다.

3) 시리아 출신 약사 M 그리고…



M은 내가 주문해준 아랍 아이스크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물 담배도 터키 커피 그리고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덩치가 컸지만 매사에 지나치게 조심하는 그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주눅 들어 보였다. 그는 시리아 출신이었다(시리아 내전 및 그곳에 기반을 둔 IS가 악명을 떨치던 때였다). 그의 아버지가 암만 모 메디컬 센터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그의 가족은 13년째 요르단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대학교도 암만에서 나왔다. 약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얼마 전에야 일자리를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약국은 아침 8시부터 24시까지 문을 연다. 그는 일주일에 금요일만 쉰다. 이틀 전까지 2시부터 22시까지 일했지만 전날부터 4시부터 자정까지 근무한다. 여자 약사와 약국 주인 그리고 그, 이렇게 세 사람이 교대로 근무한다고 했다.

내가 요르단에 도착한 2일째, 로만 엠피시어터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그의 여자 친구와 함께였다. 몇 번 더 이들과 만나게 되면서 편해졌다. M은 요르단에 살면서도 요르단 사람이 아니기에 제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이게 현재 사회를 말할 수 있었다. 진솔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면, 70~80퍼센트 이혼율(어릴 때 부모님 뜻대로 결혼했던 무슬림 여자들이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에 대한 의견과 이민자에 대한 불평등(시리아 출신인 그는 자국민보다 60만 원 적은 130만 원을 받았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 등이었다. 나는 애써 담담하게 근무 시간이 다 되어 일어나는 그와 포옹을 하고는 그의 여자 친구에게는 전화로 고마움을 전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꾸렸을 때는 이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남편과 사별하고는 6개월 째 세계 여행을 다니고 있던 마리꼬(그녀는 유일하게 모국어만 했지만 큰 캐리어를 끌고 잘 다녔다), 천만 원을 대출받아 한 학기 휴학하고는 돌아다닌다는 도쿄 교육학과 학생 토모 그리고 아침마다 손을 흔들어주었던 숙소 맞은편 법원 건물 앞을 지키던 군인….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해야 했다.

다음날 8시에 아멘을 만나 '킹 후세인 다리' 출국장까지 달렸다. 아멘도 초행길이라 이스라엘로 가는 티켓 예매 창구를 찾는 데에 힘들어 했다. 티켓 예매 창구를 찾았을 때는 그가 현지인이라는 이유로 곧장 떠나야 했다. 혼자 남은 나는 창구 직원이 시키는 대로 미리 여권과 출국세 10디나르를 냈다. 30분 뒤 도착한 버스 안에서 요금 7디나르를 지불하고는 여권을 받았다. 버스 출발 20분 뒤에 이스라엘 입국장에 도착했다. 다리 지나기 전 검문 과정에서 니캅 입은 여인과 그녀의 아이 둘이 강제로 하차해야 하는 것 외에는 무사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