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9>사찰 불전 앞 야외 조명 등기구 【 석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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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9>사찰 불전 앞 야외 조명 등기구 【 석등 】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1호)||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남원 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
  • 입력 : 2020. 05.14(목) 16:52
  • 편집에디터

1. 실상사 석등 및 점등 계단(828년경, 사진 황호균)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

어둠을 밝히려는 욕망에서 발명된 조명기구

절터의 잡초더미 속이나 천년고찰의 불전 앞마당에서 우뚝 솟은 석등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과거의 역사 속으로 잠시나마 빠져들게 된다. 그 마당에서 일어났던 아픈 역사의 질곡을 오롯이 지켜봤을 석등의 눈높이에서 다시금 지난 세월을 되새겨본다.

등(燈)은 인간이 어둠을 밝히려는 욕망에서 발명된 조명기구이다. 인간이 자연의 주술적 영역에서 벗어나 신만이 만들 수 있다는 불을 스스로 관리하게 됨으로써 등은 인간 문명의 상징임과 동시에 그 등불은 신비적 관념에서 비롯된 종교적 진리의 상징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류의 문명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등기(燈器)는 토기를 제작하여 사용하던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시대에 따라 토제등기에서 금속제·석제 등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경전에 의하면 이미 옛날부터 동제·철제·와제·목제 등 다양한 종류의 등기가 있었으며 연료로는 기름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에서 '석등' 용어 등장

우리나라에서 석등이란 용어가 맨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광주호 주변에 자리한 개선사지 석등에서부터이다. 868년에 건립된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1호) 조등기의 '건립석등(建立石燈)'이나 1093년에 만들어진 '나주 서성문 안 석등'(보물 제364호) 조등기의 '등감일좌석조(燈龕一座石造)라는 명문에서 그 용례가 확인된다.

석등은 불교적 산물

지금까지 알려진 석등을 조사해 보면 대부분 사찰에서 발견되며 고려 말 이후의 능묘에서부터 세워지기 시작하는 장명등도 역시 불교의 영향 속에서 등장하였다. 석등은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이것은 곧 불교 전래 이전의 능묘에는 석등을 세우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석등이 불교에서 기원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상 불교에서 등기는 예불을 올리는 의식에서 뺄 수 없는 기본적인 도구일 뿐 아니라 사찰에서 실시하는 모든 행사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도구의 하나로 일찍부터 제작되었다.

부처의 지혜와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여 온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법등'

불교에서 등(燈)은 예불을 올리는 의식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도구일 뿐 아니라 '가난한 여인 난다가 지극한 정성으로 밝힌 꺼지지 않은 등불'이라는 설화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이 신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등기구이다.

'연등(燃燈)'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방법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로 가득 찬 어두운(無明)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불교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등불을 켜는 것은 어둠과 번뇌를 물리치고 영원한 진리의 광명을 밝힌다는 뜻이었다. 무명으로 가득 찬 어두운 마음이 부처님의 지혜처럼 밝아지고 따뜻한 마음이 불빛처럼 퍼져나가 온 세상이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 충만토록 하자는 것이다.

가난한 여인 난다가 지극한 정성으로 밝힌 꺼지지 않은 등불

연등의 유래에 대해서는 "빈자일등(貧者一燈)"이란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난다'라고 하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을 위하여 등불 공양을 올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구걸하러 다녔으나 겨우 얻은 것이라고는 겨우 동전 두 닢뿐이었다. 이 여인은 동전 두 닢으로 등과 기름을 사고 부처님께서 지나가실 길목에다 작은 등불을 밝히고는 간절히 기원했다. "부처님, 저에게는 아무것도 공양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이렇게 보잘것 없는 등불 하나를 밝혀 부처님의 크신 덕을 기리오니 이 등을 켠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도 다음 세상에 태어나 성불하게 해주십시오." 밤이 깊어가고 세찬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밝힌 등이 하나둘 꺼졌다.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도 예외일 수 없이 꺼져 갔다. 그러나 이 여인의 등불만은 꺼질 줄을 몰랐다. 밤이 이슥해지자 부처님의 제자 아난이 등불에 다가가 옷깃을 흔들어 불을 끄려 하였다. 하지만 이 등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밝게 세상을 비추었다. 그때 등 뒤에서 바라보고 계시던 부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였다. "아난아! 부질없이 애쓰지 마라. 그 등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한 여인이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켠 등불이니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 그 여인은 이 공덕으로 앞으로 30겁 뒤에 반드시 성불하여 수미등광여래가 되리라." 또한 연등(燃燈)은 과거세(過去世)에 수행하는 보살이던 석가모니에게 미래에 성불하리라 예언하였다는 부처인 '연등불(燃燈佛)'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는 지혜의 등불

등불의 주된 기능이 어둠을 밝히는 것이므로 여기에서 착안하여 불교에서 등은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는 지혜에 비유한다. 부처의 지혜와 가르침을 '대명등'이라 부르며 부처의 법등은 중생의 어리석음과 세상의 어둠을 밝혀준다는 뜻을 지닌다. 그러므로 불전에 등불을 켜고, 연등행사를 치르는 것은 부처의 지혜와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여 온 세상에 진리의 '법등'을 밝히겠다는 뜻이 담겼다.

이처럼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것은 공양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신앙적 가치 속에서 야외의 신앙 조형물로 석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불교는 기독교나 다른 종교에 비해 등의 개념이 빛을 비추는 단순한 기능에 머무르지 않고 교리적인 측면에서 심오한 상징적인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야간 조명의 실용성과 연등의 상징물

우리나라에서 석등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야간 조명을 위한 실용적 기능 뿐만 아니라 연등의 의미를 상징화하기 위해 가람의 중심부에 배치하여 불전이나 탑과 아울러 중요한 신앙적 상징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등은 충청남도 부여의 가탑리사지의 석등 하대석과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의 석등 옥개석·화사석·하대석이 조사되었는데 모두 백제시대에 만들어졌다.

석등은 기본적으로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받침으로 하고 그 위에 등불을 직접 넣는 화사석과 지붕인 옥개석을 얹고 난 후 맨 위를 보주로 장식한다. 이러한 석등의 모습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받침 역할을 하는 간주석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화하게 된다. 대부분의 석등은 간주석이 팔각기둥 모양을 하지만 '장고' 배 모양(鼓腹形)을 하기도 하고 사자를 한두 마리 배치(雙獅子形)하기도 하며 사람을 등장(人物形) 시키기도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호남지역에서 유행한 고복형(鼓腹形)의 석등이 유독 우리의 관심을 끈다. 부재가 주로 팔각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전형양식의 석등과 같지만 간주석의 평면이 원형이고 중앙에 굵은 마디를 두어 '장고의 배 모양'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나아가서 하대석이나 옥개석의 귀꽃을 크게 강조하고 화창구를 화사석의 8면에 모두 뚫은 특징을 보인다.

대표적인 고복형 석등은 개선사지 석등(868년, 보물 제111호),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9세기 후반, 국보 제12호). 실상사 석등(9세기 후반, 보물 제35호), 임실 용암리 석등(9세기 후반, 보물 제267호)이 있다.

호남지역에선 고복형(鼓腹形) 석등 유행

개선사지 석등은 광주호의 서쪽인 개선동 마을 입구의 논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 석등이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이유는 불 밝기창틀 팔각기둥에 음각으로 새겨진 136자의 해서체 명문 때문이다. 868년에 경문대왕과 문의왕후(文懿王后), 큰 공주가 주관하여 승려 영판(靈判)이 석등을 건립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또 891년에 승려 입운(入雲)이 석등의 유지비를 위해서 곡식 100석으로 오호비소리(烏乎比所里)에 사는 공서(公書)와 준휴(俊休) 두 사람이 논을 매입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공서와 준휴 두 사람에게서 구입한 땅의 지명인 '石保坪大□'에 등장하는 석보리는 ??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 / 신증 1530년)과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등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충효동 배제(梨峙 : 梨岾) 부근으로 조선 세종연간에는 도자기를 생산했던 충장사 주변으로 고증된다. 석보평은 바로 이러한 석보리에 위치한 들로 여겨진다. 개선사석등기는 일종의 토지매매문서의 성격으로 통일신라시대 토지매매의 관행과 토지의 종류, 그리고 토지의 소유관계 및 생산력 등 당시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명문의 서체는 북위(北魏)와 당(唐) 초기의 글자가 융합된 것으로 우리나라 서체의 변모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화엄사 각황전 앞의 석등은 팔각형을 기본으로 삼은 고복형으로 현존하는 석등 중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걸작품이다. 이 석등은 지금은 각황전 앞에 위치하나 석등 건립 당시 그 자리는 3층의 장육전이란 웅장한 규모의 전각이 서 있었다고 한다. 이 3층 장육전과 어울리게 거대한 석등을 세워 놓은 것이다. 제작 시기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실상사의 석등은 쌍탑과 보광전 사이의 중앙에 위치한다. 이 석등의 조성 연대는 증각 홍척스님이 실상사에서 선문을 연 828년 흥덕왕 3년부터 홍척스님이 열반하신 9세기 후반 사이 가운데 가장 활동이 왕성한 시기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석등의 앞면에는 등을 켤 때 오르내리는 용도로 사용된 점등 계단이 남아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석등 가운데 유일한 예이다.

야간 야외 조명 등기구

예전에는 석등의 용도에 대해서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서만 해석하려 했다. 하지만 석등을 유심히 관찰하면 실생활에 사용된 흔적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대부분 석등에서는 불을 밝히는 화창 주변에 한 단 낮은 홈이 테두리를 이루며 돌려져 있다. 그 주변 상·중·하 좌우에 가는 구멍도 뚫렸으나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이 홈 테두리와 구멍들은 바람에 등불이 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기름종이창틀' 부착 흔적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실상사 석등에서는 석등 앞에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높은 석등의 화창에 가까이 접근해서 불을 붙이기 쉽게 하기 위한 점등 장치이다. 이처럼 실상사의 점등 계단은 우리나라에서 오직 이 실상사에만 남은 유일한 자료이며 창틀 부착 흔적과 함께 석등이 공양구로서의 장식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나아가 실용적인 야간 야외 조명 등기구로서 사용된 사실을 증명해주는 엄청난 자료이다.

조형적 아름다움 돋보이는 걸작 많아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석등은 대략 280여 기에 달하며 약 90%는 사찰의 석등이고 나머지는 능묘용 장명등이다. 그 가운데 형태가 완전한 것은 60여 기에 이른다. 백제시대 석등은 일부 부재만 조사되었지만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하며 통일신라시대 석등은 26기, 고려시대 석등은 31기, 조선시대 석등은 6기이다. 특히 같은 불교문화권인 인도나 중국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 석등은 그 수가 많고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돋보인 걸작품이 많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짝 꽃 피운 석등 문화는 연등 공양의 실천적인 의미인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로서 오늘도 우리에게 그 빛을 비춘다.

2. 실상사 석등 및 점등 계단(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0년대 촬영)

3. 실상사 석등 불 밝기창에 보이는 창틀 테두리와 부착 구멍(사진 황호균)

4. 실상사 석등 점등 계단(사진 황호균)

5. 개선사지 석등(868년, 사진 윤여정)

6. 개선사지 석등 옛 사진(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30년대 촬영)

7. 개선사지 석등 불 밝기창에 새긴 조등기(사진 황호균)

8. 개선사지 석등 조등기 탁본(일본 국회도서관 소장 '石燈籠' 덴누마의 탁본)

9.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원경(9세기, 사진 황호균)

10.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옛 사진('조선고적도보 Ⅳ', 1916년, 조선총독부)

11.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9세기, 사진 황호균)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