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월18일 비무장 상태의 시민들이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5·18기념재단 제공 |
말로 할 수 없는 충격과 분노에 몇 자 적으려 한다.
아침 뉴스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을 접하고 금남로에 나갔다. 화창한 날씨였지만, 금남로 일대엔 을씨년스러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금남로 YWCA 부근에 대학생과 시민 십여 명이 모여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곳에서 오전 중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과 군인 간 대치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문 앞을 막아선 계엄군이 시위하던 학생은 물론 도서관 가던 학생까지 수십여 명을 끌어냈다고 한다. 듣고도 믿겨지지 않는 일이다.
"비상계엄을 해제하라!", "휴교령 철회하라!" 대학생 300여 명이 카톨릭센터 앞으로 모였고, 잠시 후 지옥이 펼쳐졌다. 전투경찰이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던지며 시위 해산을 시도했다. 경찰 숫자도 학생 시위대를 압도할 만큼 많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시위를 이어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학생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계엄군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광주제일고등학교 교문으로 이어지는 길목 쯤에서 공수부대가 갑자기 멈춰섰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달려와 몽둥이와 M-16소총으로 폭행했다.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았던 학생들은 계엄군의 군홧발에 짓밟혀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
"나는 데모 안했당께." 내 앞에서 길을 가던 남성이 쫓아오는 계엄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그는 커다란 개머리판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 머리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지도 모르고 급히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한참 뒤 옷이 반쯤 벗겨진 사람들을 태운 군용 트럭 10여 대가 건물 옆을 지나갔다. 건물 한 쪽에 여학생 한 명이 기절해 있었다. 피로 물든 교복은 칼로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다. 여학생의 팔 한 쪽을 어깨에 둘러매고 병원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병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병원을 가득 메운 비명소리, 고통 속에 죽어가던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부터 머리가 깨진 사람, 복부를 찔려 내장이 파열된 사람까지 치료가 급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또 자랑스런 자식이다. 그들에게 누가, 무엇 때문에 폭력을 행사한단 말인가.
9시 통금에 맞춰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방 안의 커튼을 모두 치고, 책상 위 작은 조명 하나만 밝혔다. TV를 켜고 소리를 최대한 줄였다. 뉴스가 끝나도록 낮에 본 끔찍한 광경들은 보도되지 않았다. 광주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군모 밑으로 얼핏 보인 계엄군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벌겋게 뒤집힌 두 눈은 그들이 이미 이성을 잃었음을 알려줬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왜 무고한 시민들을 개패듯이 패고 죽이려 하는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또 들려오는 것 같다. 오늘 밤은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