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재규> 기술 발전과 자원봉사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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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재규> 기술 발전과 자원봉사의 미래
김재규 광주광역시자원봉사센터 이사장
  • 입력 : 2022. 04.28(목) 13:02
  • 편집에디터
김재규 이사장
민주주의를 논할 때, 토크빌과 함께 꼭 거론되는 학자가 한나 아렌트다. 그녀는 '공화국의 위기'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착한 인간과 좋은 시민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착한 인간은 어느 사회에서도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시민은 좋은 국가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는 그는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좋은 시민과 관련해서 자원봉사의 개념을 잡는데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표현들이 있다. '자원봉사자는 착한 사람'이라거나 '자원봉사자는 천사'라는 말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나 아렌트의 표현에 빗대어 보면 자원봉사자는 독재국가에서도 그냥 착한 일만 한다는 것인데,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시민성을 갖춘 훌륭한 자원봉사자의 모습과는 괴리가 있지 않은가?

자원봉사가 약자에 대한 돌봄과 보살핌을 기본으로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정도로 커지는 국가권력을 막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좋은 시민'으로서의 '자원봉사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기술발전과 4차 산업혁명시대가 도래하면 자원봉사는 어떻게 변화할까? 멀지 않은 미래에 요양원에서 치매나 중풍으로 고생하는 어르신들을 로봇이 케어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자원봉사자가 설 영역은 더 좁아질 것이다. 그럼 자원봉사가 필요 없어지는 것일까?

실제로 독거 어르신을 돌보기 위해 도입되고 있는 AI말벗 로봇이 있다. 케어란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어느 순간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인 AI가 장착된 로봇이 외로움과 무료함에 지쳐있는 어르신을 케어하고 있는 것이다. 고독사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도입되기도 한다. 문제는 근본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케어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케어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과 관련된다. 물론 케어가 노역이 되어 힘에 부칠 때 로봇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많다. 그래서 코봇이라는 개념의 로봇이 인간과 협력하는 시스템으로 도입되는 곳들도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배려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고 말한다. 자원봉사가 인간에 대한 배려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앞의 로봇의 예를 보자. 로봇이 전적으로 인간을 케어하는 것이 아니라 케어는 인간과 인간이 하는 것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생각해보자. 로봇이 케어를 다해버리면 어떤 인간이 배려를 체화하겠는가? 다시 말해 누구도 나를 케어하지 않을 것이고, 나도 누군가를 케어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공동체 의식의 소멸로 이어질 수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따라서 케어는 역시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자원봉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일자리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자원봉사가 왜 더 중요해지는지 살펴보자. 미래학자인 니콜라스 카는 "인간이 하는 '일'은 깨달음의 근본 형식이다. 세상은 유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참여하여 깨닫는 길이다."라고 말한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는데 체득과 터득을 이야기한다.

'일'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일자리가 줄어들 것은 누구나 짐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원봉사가 삶의 방식을 체득하는 것을 메꿔줄 수 있지 않을까?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풍요를 생각해보라. 일자리가 굳이 없어도 되는 인류가 늘 꿈꾸던 '놀고 먹는' 최고의 상황을 상상해보라. 하지만 어떨까?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로 가는 것은 아닐까?

일자리가 없어지더라도 기본 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것이다. 일은 돈벌이 그 이상의 가치가 있질 않던가? 그것이 바로 깨달음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인간은 자원봉사를 통해 삶의 목표를 다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자원봉사는 지역사회 문제해결이나 자신이 관심 있는 영역에 참여를 통해 보람을 느끼고 자아가 충만해지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원봉사의 체험과 경험의 과정 속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에 참여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스마트 시티와 스마트 시티즌(시민) 논쟁에 비추어서도 생각해보자. 현재 동아시아 국가들의 특징은 스마트 시티를 첨단기술이니까 마구 가져다 쓰는 경향이 있다. 유럽은 상당히 다른 모습인데 그들은 누구를 위한 도시계획이냐고 먼저 묻는다. 그러면서 스마트 시티가 아닌 스마트 시티즌을 이야기한다.

문제는 파괴적 기술혁신이 가져올 인간의 미래상이 AI의 아바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이 바둑둘 때 알파고 자리에 앉아서 표정 없이 돌을 대신 놓던 아바타 기사에 주목하던 사람들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인간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보다 이제는 AI가 결단하는 것을 더 신뢰하는 사회가 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면 그 아바타 바둑기사가 인간의 미래가 되지 않을까? 라는 주장이다.

사실 '혁명'은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자기들이 그리는 미래로 가는 것을 말하는데 4차 산업혁명은 이상한 혁명이지 않은가? 인간이 아닌 AI가 결정하는 것이 혁명인가? 게다가 인간이 서로 필요하지 않는 반인간적인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스마트 시티도 사람이 중심이 되어 있는지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스마트 하자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스마트폰 같은 기기 들고 다닌다고 스마트 시티즌은 아니다. 지능이 아닌 지성이 중요한 이유다. 인공지능 AI가 할 수 없는 인간만의 다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스마트 시티즌은 공동체에 책임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적 인간이다. 그들을 통해 현재가 좋은 역사로 미래에 계승되는 것이지 않은가? 미래는 역사를 파괴시키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좋은 역사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잘못된 정치체제와 특히 비민주적 정치체제가 스마트 시티와 결합하면 스마트 수용소가 된다. 홍콩사태에서 시민들은 안면인식기술을 갖춘 스마트 가로등을 뜯어냈다. 인간을 탄압하는 기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좋은 시민'과 '스마트 시티즌'이 많아질 수 있도록 자원봉사를 새롭게 접근하자. 자원봉사는 4차 산업혁명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깨달음과 체득의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