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농민항쟁 7)1924도초도 소작쟁의> 신안 농민항쟁 최초 일제 경찰과 직접 맞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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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농민항쟁 7)1924도초도 소작쟁의> 신안 농민항쟁 최초 일제 경찰과 직접 맞서 투쟁
신안농민항쟁 7)1924년 도초도 소작쟁의 전개 과정||최 성 환(목포대 사학과·도서문화연구원 교수)||고석규 도초면장과 갈등 '단초'||일제·조선인 지주들, 인하 거부||1926년 '도초농민조합' 변경||소작료 불납동맹 활동 이어가||원정투쟁에 각지 후원품 쇄도
  • 입력 : 2022. 06.02(목) 10:39
  • 신안=홍일갑 기자

목포경찰서 원정 투쟁을 온 도초도 주민들. 출처 동아일보(1925.10.23.). 최성환 제공

신안 도초도를 습격할 때 이용한 목포경찰서 해양경비 전용선박 금강환 모습. 목포사진첩 자료. 최성환 제공

도초도 고란평야 전경. 신안군 제공

일제강점기 현 신안군 도초도에서도 치열한 소작쟁의 투쟁이 일어났다. 암태도에 비해 그 사실이 잘 알려지지 못했다. 최근 연구성과(일제강점기 도초도 소작쟁의의 전개과정 특징·한국사학보 86호·2022)를 토대로 두 차례에 걸쳐 '전개 과정'과 '주도 인물과 특징'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도초도 소작쟁의가 어떤 과정으로 전개됐는지 알아보자.

●도초도 농지 상황

도초도는 지형적으로 중앙의 큰 만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긴 산맥이 마주 보고 있는 형세다. 그 사이가 조선시대부터 간척되면서 '고란평야'라 불리는 대규모 농경지가 조성됐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도초도 사람들은 농업에 의존하며 생업을 유지해 왔다. 조선시대 도초도는 해남에 속해 있었고 주요 토지는 명례궁(明禮宮)에 속한 궁방전(宮房田)이었다. 궁방전은 조선시대 궁방이 소유 또는 수조(收租) 권한을 행사하던 전답을 칭하는 말이다. 1910년대 중반에 궁방전이던 도초의 대다수 토지가 개인에 넘어갔고 1921년부터일본인 소유자 이름이 다수 등장한다. 도초소작쟁의가 발생하는 1920년대 중반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가 함께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암태도 소작쟁의 당시 투쟁 대상이던 지주 문재철이 도초도에도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초도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도초도 소작인회의 결성

도초소작쟁의는 1924년 10월 소작인회가 결성되면서부터 시작됐다. 1926년 2월15일 단체 이름을 도초농민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할 때까지 2년에 걸쳐 지속됐다. 도초도 소작인회는 1924년 10월에 김용택의 주도로 소작 조건의 유지·개선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결성과 동시에 소작료율을 낮추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고 이를 수용하지 않는 지주를 상대로 소작료 불납 운동을 진행했다. 소작인회는 소작료율을 답(沓)에 4할, 전(田)에는 3할로 감액을 요구했다.

●면장과 갈등…다도농담회의 등장

도초도 소작쟁의 초기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도초면장과 갈등이다. 당시 면장은 고석규(高碩奎)였다. 그는 1919년부터 1925년까지 도초면장을 지냈다. 면장은 소작권을 관리하는 지주들의 '마름'을 옹호했다. 도초소작인회는 면민대회(1924.12.20)를 열고 면장의 비행을 알리며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그 결과 1925년 4월 면장이 교체되면서 갈등이 해소되는 듯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지주들이 단합해 '다도농담회(多島農談會)'를 결성하면서 상황이 더 나빠졌다. 다도농담회는 기존에 소작인들과 협의한 내용을 파기하고 5할 소작료를 제시하면서 소작인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당시 투쟁의 대상이 되는 대표 지주는 한국인 문재철・윤영현, 일본인 금정풍마・중도청태랑 등이었다. 소작인 요구를 강경히 거부하고 소작료 가차압을 강행하면서 소작인들과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법원·경찰 강제 집행에 소작인회 격렬 저항

1925년 9월21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사무원인 집달리(執達吏) 3명과 목포경찰서 서원 몇 명이 소작인회의 불납 소작료를 가차압 하려고 도초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도초소작인회 4000여 명이 불섬(화도) 부두에 모여 저지하자 강제 집행을 포기하고 목포로 돌아갔다. 2차 시도는 10월 7일이었다. 목포경찰서 고등계 주임의 지휘하에 경관 4명과 집달리 5명이 다시 도초에 들어갔다. 도초소작인회는 집달리를 바다나 도랑으로 밀어내는 등 강력하게 저항했다. 소작인들의 단체행동에 기가 눌린 일본인 경부는 지주과 소작인 사이의 친화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는 증표를 써주고 목포로 돌아갔다.

●무장경찰대 도초도 기습

도초도에서 돌아온 목포 경찰은 10월 10일 밤 경관 120명을 무장시키고 도초도로 다시 출동했다. 광주와 나주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며 다수의 무장 경관대를 조직한 후 경비선 금강환(金剛丸)을 타고 도초도를 급습했다. 소작인 간부를 체포하는 일이 마치 반란군을 진압하는 비밀작전처럼 실행됐다. 지주와 소작인 간 친화를 위해 장래에 노력하겠다는 증서까지 쓰고 돌아왔던 목포경찰서 경부는 이러한 기습작전을 통해 도초도 소작인들을 공무집행 방해 명분으로 체포해갔다. 김용택 등 소작인회 간부 20여 인이 붙잡혀갔다.

●도초 주민 200여 명 목포 원정투쟁

1925년 10월19일 도초도 주민 200여 명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목포 원정투쟁을 감행했다. 목포경찰서 항의 방문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진압이 있었고 주민 15명이 추가 구속됐다. 경찰은 노인들이 가지고 간 지팡이를 곤봉이라며 증거품으로 압수했고 섬 주민들을 구둣발로 차고 군도로 때렸다.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중상자는 목포 죽동 삼산병원에 입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목포청년회의 도움을 받아 목포청년회관에서 몸을 추스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도초소작인회는 구속된 소작인회 회원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소작료율 인하의 실현을 방해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광주까지 대표자 파견

목포경찰서 항의 방문 과정에서 추가 체포된 사람들은 주민대표 5명이 경찰서장과 면담을 통해 '다시는 폭동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석방됐다. 이에 다수 사람들은 일단 도초도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나이 많은 부인들이 간부들이 수감돼 있는 광주로 진출하자고 주장했다. 여성들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도초도 소작인들은 영산포까지 배를 타고간 뒤 광주까지 걸어서 항의 방문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목선을 타고 영산포로 가려 했으나 당시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배를 이용하지 못했다. 육로로 21일 목포를 떠나 22일 오후 나주에 도착했지만 경찰들이 출동해 이들을 목포로 돌아가도록 저지했다. 결국 남녀 6명을 대표로 선정해 광주에 파견하기로 한 뒤 목포로 다시 돌아갔다. 목포로 내려온 도초도 주민들은 곧바로 목포경찰에 체포돼 목포역 정거장에 감금됐다.

●광주 각처에서도 후원 활동

광주 대표로 선발된 양순형 외 5명은 23일 아침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 노동공제회관(勞動共濟會舘)에서 각 단체 대표자와 만나 대책을 강구했다. 당일 그들은 광주지방법원의 책임자인 검사정(檢事正)을 방문하고 다음날 24일 전남도 경찰부장을 면회하며 그동안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이후 도초소작인회는 10월30일 총회를 열어 △남녀장정으로 제한 없이 광주법원으로 두 번째 출동할 것 △희생자 사식(私食) 및 의복을 회(會)에서 제공할 것 등을 결의했다. 실제 윤금병과 박재순 두 사람을 광주에 파견해 광주청년회관 내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각 처의 후원품을 이곳에서 받는 활동을 이어갔다.

●도초소작쟁의 투쟁 성과

도초소작쟁의는 해를 넘겨서까지 계속됐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됐지만 소작료 불납 방침은 계속 유지됐다. 도초소작인회는 소작쟁의를 통해 대부분 지주로부터 소작료율 4할을 수용하는 성과를 거뒀다. 도초도 50여 명의 지주 중 40여 명은 소작회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지주인 문재철과 중도청태랑 등 몇 명은 강경하게 거부함에 따라 이에 대한 투쟁을 끝까지 이어가는 양상이었다.

도초소작쟁의는 1924년 10월 소작인회의 결성과 함께 시작됐다. 소작료율을 낮추기 위해 소작료 불납동맹과 같은 방식의 단체행동을 전개 했으며 일부 악덕 지주들의 가차압에 맞서다가 주요 간부들이 체포됐다. 굴하지 않고 도초도 주민들은 수감 간부들의 석방을 위해 목포경찰서에 단체 원정투쟁을 실행하고 광주로 주민대표를 파견했다. 그 과정에서도 수시로 총회를 열어 소작료 불납동맹을 지속할 것을 결의하면서 그 투쟁을 계속했다. 이후 도초소작인회는 1926년 2월15일 총회를 열어 단체 명칭을 '도초농민조합(都草農民組合)'으로 변경한 후 활동을 이어갔다.

1925년 목포 원정시 도초도 주민들 안식처가 됐던 목포청년회관 현재의 모습. 최성환 제공

신안=홍일갑 기자 ilgapho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