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농민항쟁 8·끝)도초도 소작쟁의 주도 인물·특징> '지주 대 소작인'서 '소작인 대 일제 공권력 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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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농민항쟁 8·끝)도초도 소작쟁의 주도 인물·특징> '지주 대 소작인'서 '소작인 대 일제 공권력 격돌
8)도초도 소작쟁의 주도 인물·특징||최성환(목포대 사학과·도서문화연구원 교수)||1925년 1000여명 소작쟁의 투쟁||주도자 김용택 …10개월 형 받아||식민 치하 사회문제 공감대 형성||신안 최초 공권력에 직접적 저항||일제 무장경찰대 야간 전격 기습 ||전국 각지 단체·개인 ‘후원 쇄도’
  • 입력 : 2022. 06.09(목) 10:18
  • 편집에디터

도초도 소작쟁의에 참여하며 수감된 소작인들 출신 마을들 분포현황. A지역 수항리에서 11명, B지역 외남리에서 5명이 참여해 체포됐으며 C지역 발매리 4명, D지역 지남리 1명 등 4개마을에서 주로 참여했다. 당시 참여자 나이대는 24세~42세였다.

일제강점기 신안군 도초도에서는 1924년 10월 소작인회의 결성과 함께 강렬한 소작쟁의가 전개됐다. 도초도 소작쟁의 주도 인물과 쟁의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에 대해 살펴보자.

●1000명 참여 도초도 소작쟁의

도초도 소작쟁의에는 최대 1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동참했다. 1925년 10월 7일 소작료 강제 차압이 시도됐을 때 이를 막기 위해 소작인회 사무실에 모인 숫자가 1000명이었다. 이후 무장경찰대에 체포 수감 된 간부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목포경찰서로 원정을 간 인원만 200여 명이었다. 소작쟁의 과정에서 보여준 섬 주민들의 단결력은 대단했다. 그 가운데 당시 참여자 실명이 확인된 사례는 현재 총 65명이다. 체포 수감 된 소작인회 간부, 목포원정에서 부상당 한 사람, 총회에서 의장을 맡은 인물의 명단이다. 이들 중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한 이들은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된 간부들이다.

●감옥서 고초 당한 섬 주민들

일제는 무장경찰대를 동원해 1925년 10월 10일에 도초도를 기습, 소작인 간부들을 체포 구속했다. 소작료 강제 차압을 방해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판결문과 신문기록을 통해 총 25명의 이름이 확인된다. 문종열・김종담・김명주・김명율은 체포 10일 후 먼저 방면됐다. 나머지 인원은 이듬해 3월 19일 면소되거나 5월 10일 실형 혹은 벌금형을 받았다. 김용택은 10개월형, 김상희는 8개월형, 문상연·박창진은 8개월형, 강경용·고만희·고형빈·김병섭·김종보·김종원(김종언)·박정수·최동민 6개월형, 고경일·김행중·박남기는 벌금30원, 강기수·고점수·김양보는 면소 판정을 받았다.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오래 걸려서 면소 판정을 받은 이들도 실제 최소 5개월 이상 구속됐던 상황이다. 마을별로 보면 수항리(11명·A)・외남리(5명·B)・발매리(4명·C)・지남리(1명·D) 4개 마을에서 주로 참여했다. 참여자 나이는 1925년 기준 24세부터 42세까지였다. 강기수와 최창수가 42세로 가장 많았고 김종보와 김행중이 24세로 가장 나이가 젊었다. 직업은 대부분 농업이고 김용택은 무직, 김종보는 학교 교사였다.

●도초도 소작쟁의 주도자 김용택

가장 핵심 인물은 구속 후 유일하게 10개월형을 받은 '김용택'이다. 그는 소작인회의 회장이었다. 1924년 10월 도초도 소작인회를 결성한 후 곧바로 무목청년연맹(務木靑年聯盟) 창립에도 참여했다. 지주 대상 소작료율 인하 요청, 무안군청 방문 도초면장 교체 청원, 가차압을 하러 온 경찰관 저지 및 협상 활동 등을 주도했다. 1927년 출옥했을 당시 기사에 '도초도 소작쟁의 수노자'라고 표현됐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자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열렸다. 해방 이후 그는 무안군의 초대 군수(재직기간 1948.12.11~1950.4.1)를 지내기도 했다. 김용택과 함께 김상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구속되지는 않았으나 소작인회 총회의 사회자로 참여한 이태규・박태년・고원일・조상숙·박복영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산안군에서 열린 농민운동 후손들과 간담회 장면.

●소작쟁의에 담긴 식민지 사회 인식

소작쟁의는 기본적으로 불합리한 소작료율을 적용하는 악덕 지주를 대상으로 하는 생존권 투쟁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소작쟁의에는 식민정책에 대한 비판의식이 깔려 있었다. 도초도 소작쟁의 간부들이 붙잡혀 간 이후 보도된 동아일보 1925년 10월 14일 기사에는 "소작쟁의는 기본적으로 소작인의 지주와의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시작하지만, 이 시기의 소작쟁의는 더 큰 문제가 깔려있음"이 언급됐다. 소작쟁의가 더 확대돼 가는 것은 법규가 갖춰지지 않은 점, 당국이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방관하는 점, 지주보다 위정자의 죄라는 점이 강조됐다. 일제강점기 소작쟁의는 단순히 지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치하의 사회문제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전개된 항쟁이었다.

●전국 사회단체 협력·지원

도초도 소작쟁의는 단순히 도초도 주민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전국 각지에 조직된 다양한 사회단체에서 도초도 소작쟁의에 관심을 갖고 협력했다. 각 단체의 대표자를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게 하거나 후원금을 보내는 방식으로 힘을 보탰다. 조선청년동맹・조선노농총동맹 등 전국 조직과 함께 경성노동회・원산노동회・순천농민공제회・전라노농연맹・개성자유회위원회・경북안동 사상회・창원청년연맹・철원청년회 등이 도초도 소작쟁의 돕기에 나섰다. 경성은 물론 지역적으로 황해도와 강원도 등지에서도 지원했고 후원금도 전국 각지에서 각종 단체와 개인이 보내왔다.

●공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

도초소작쟁의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일제강점기 공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항쟁 성격이 강했다. 1925년 9월21일과 10월7일 소작료 불납에 대해 가차압을 시행하기 위해 도초도에 들어 온 일제 경찰과 공무원들을 섬 주민들이 단체행동을 통해 직접 막았다. 이에 대한 보복을 다시 무장경찰대가 도초도를 기습하기에 이르렀다. 암태도 소작쟁의의 경우는 문태현 지주의 공덕비를 파괴하는 것과 관련, 지주 측과 소작인 측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수감자들도 대부분 이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도초도의 경우는 일제 경찰과 공무원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소작인들이 직접 단체행동을 실행했다. '지주 대 소작인'이라는 갈등 관계가 '소작인 대 일제 공권력'이라는 대립 구조로 표출됐다. 도초도 군민들은 폭력적인 방식의 시위도 불사하겠다는 투쟁의지를 보였다. 판결문에는 "경찰관을 때리거나 쫓아내라고 소리쳤고 돌을 던지거나 순사를 바다 속으로 밀어넣는 행동, 일본인 순사부장의 뺨을 구타한 사례" 등이 언급돼 있다. 이처럼 일본 경찰에 맞서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구속 간부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200명의 대규모 인원이 목포로 가서 원정투쟁을 강행했다. 부상자가 속출했음에도 간부들이 구속돼 있는 광주형무소까지 직접 진출할 것을 결의했고, 이 또한 실행에 옮겼다. 비록 경찰의 방해로 단체가 광주로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대표단을 광주로 파견했다. 붙잡힌 임원진을 대신할 임시 집행위원도 19명이나 선발했다. 기존 임원 숫자보다도 더 많았다. 그만큼 소작인회의 조직이 탄탄했고 투쟁의식이 강력했음을 시사한다.

●지주 단체와 대립 구조

두 번째, 투쟁 대상에 '다도농담회'라는 지주단체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다수 지주로 구성됐으며 그 안에 일본인 지주가 포함됐다. 문재철・윤영현・중도청태랑・시야장작・금정풍마 등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들은 소작쟁의를 방해하기 위해 지주단체를 결성했고, 그 결과 도초도 소작쟁의가 격화되는 배경이 되었다. 소작인회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일부 지주들 사이에 요구사항을 수용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가, 다도농담회가 결성된 이후 다시 분위기가 악화되었다. 일본인 지주가 포함된 '다도농담회'라는 지주 단체와 싸워야 했다는 점이 도초도 소작쟁의의 특징이다.

무장경찰대를 앞세워 도초도를 기습한 목포경찰서 모습. 도초 주민 200여명이 항의 원정 투쟁을 실행 했던 장소다. 출처 =목포사진첩·1932년

●군사행동에 버금가는 소작인간부 체포 작전

세번째, 일제 경찰의 진압과정이 군사행동에 버금갈 정도였다는 점이다. 법원과 경찰에서 소작료 강제 차압을 위해 도초도에 진입했다가 실패하자 120명의 무장경찰대를 구성해 야밤에 도초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새벽까지 주요 간부를 체포했는데 그 과정이 단순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경찰출동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마치 3·1운동의 확대를 막기 위해 군사력까지 동원하여 무력 진압에 나섰던 것과 유사했다.

이처럼 도초도 소작쟁의는 식민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갖고 강력하게 전개된 항일민족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직접 식민 치하의 공권력에 맞서는 양상이었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항쟁 의식이 그 어느 소작쟁의보다 투철했다.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현재 신안군은 '신안군항일농민운동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을 하고 있다. 소작쟁의 과정에서 감옥에 간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도초도에 일제강점기 소작쟁의 기념탑이 건립될 수 있도록 하는 작업도 추진 중이다.

신안군 도초도 전경. 신안군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