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김덕령 태어난 곳… 정조가 '충효리' 이름 지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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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김덕령 태어난 곳… 정조가 '충효리' 이름 지어줘
광주 충효마을||덕령 형제·부인 충효정신 기려||직접 비석 만들고 비각 세워줘|| 천연기념물 '왕버들나무' 눈길||환벽당·취가정·호수생태원||산책하기 좋은 공간 둘러싸여
  • 입력 : 2022. 12.01(목) 17:14
  • 편집에디터
광주호호수생태원. 광주댐 주변의 생태와 어우러지는 친수공간이다. 이돈삼

왕버들나무가 있다. 수령 400년은 거뜬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른 서너 명이 두 팔을 벌려야 닿을 듯한, 나무의 우람한 기둥에서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눈과 비바람은 얼마나 맞았고, 햇볕은 얼마나 받았을지, 천둥소리와 번개는 또 얼마나 듣고 맞았을지….

세월이 빚어낸 주름이 큰 물결처럼 나무에 새겨져 있다. 풍수지리로 볼 때 비보림(裨補林)이다. 지형의 약점을 보완했다. 자연유산인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충효마을의 왕버들은 본디 다섯 그루였다고 전해진다. 소나무와 매실나무도 한 그루씩 있었단다. 1송 1매 5류로, 마을의 상징이었다. 왕버들나무는 충장공 김덕령(1567∼1596)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김덕령이 태어난 기념으로 심었다는 설이 전한다. '김덕령 나무'로 불리는 이유다. 충효마을과도 한몸으로 엮인다.

광주호호수생태원. 광주댐 주변의 생태와 어우러지는 친수공간이다. 이돈삼

충효마을은 광주광역시 석곡동에 속한다. 증암천을 사이에 두고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과 맞닿아 있다. 증암천이 경계를 이룬다. 증암천은 '자미탄(紫薇灘)'으로도 불린다. 옛날 천변에 진분홍 배롱나무가 지천이었다고 이름 붙여졌다.

주민들에게 충효마을은 '성안마을'로 더 익숙하다. 마을이 성 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성안'이다. 마을 뒤편 대숲에 돌로 쌓은 담이 일부 남아 있다. 옛 성터의 흔적이다. 마을사람들이 먹는 물로 쓴 충효샘과 쉼터 부연정도 복원돼 있다. 고샅의 돌담에는 매화가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돼 있다. '1송 1매 5류'를 떠오르게 한다.

왕버들과 함께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건 마을의 이름(忠孝里)이다. 지명에 한 시대의 무게감이 배어있다. 1788년 정조가 직접 지어 내려줬다. 김덕령 형제와 부인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복원된 부연정. 마을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 이돈삼

광주의 도로명 '충장로'의 주인공이기도 한 김덕령은 1567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과 함께 의병에 참여했다. 하지만 연로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형의 권유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복에 검은 물을 들이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나이 26살 때였다.

김덕령은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충용장군', '익호장군' 군호를 받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 전쟁이 소강국면에 있을 때 모함을 받았다.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라는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고 가다가, 평정 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몽학의 반란에 함께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붙잡혔다.

황지해 작가의 '해우소 정원'. 몸을 비우고 마음을 비워 스스로 자유롭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꿈을 담고 있다. 이돈삼

의금부에서 20여 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몸은 물론 마음까지 할퀴고 찢기어 결국 죽고 말았다. 1596년, 나이 29살 때였다. 천하의 충신이 만고의 역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봄동산에 불이 나니/ 미처 못다 핀 꽃들이 모두 불에 타 죽는구나/ 저 산의 저 불은 끌 수 있는 물이나 있지만/ 이 몸의 연기 없는 불은 끌 수 있는 물이 없구나.' 김덕령이 지은 시조 '춘산에 불이 나니'의 전문이다. 자신의 억울한 신세를 한탄하며 지었다고 전한다.

김덕령의 억울함은 1661년에야 풀렸다. 병조참의,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정조 때인 1788년엔 '충장'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이듬해 좌찬성으로 추증됐다. '충효리' 지명도 그때 내려줬다. 김덕령의 삼형제와 부인 흥양이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다. '충효리' 표리비석도 보내 마을 앞에 세우도록 했다.

김덕령의 삼형제와 부인 흥양이씨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비. 비석에는 '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라고 새겨져 있다. 이돈삼

정려비에는 '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라고 새겨져 있다. 우리 역사에서 마을이름을 나라에서 지어준 첫 사례였다. 임금이 비석을 만들어주고, 비각까지 세워준 마을이다.

충효마을에 김덕령의 생가 터가 남아 있다. 부조묘도 있다. 부조묘는 공훈이 큰 사람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도록 나라에서 내려준 사당을 가리킨다. 정조가 내려준 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이 편액으로 걸려 있다.

충효마을에는 주민들이 정월대보름날 전야에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도 있다. 수령 200년 된 느티나무다. 당산제는 지금껏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 지난해에도 간단하게 지냈다.

"당산제를 지내고, 집집마다 상도 차렸어요. 사물놀이 앞세우고 하루종일 지신밟기 하면서 액땜을 했죠. 90년대 초까지 그렇게 했는데, 지금은 많이 간소화됐습니다." 마을주민 김환우 씨의 얘기다. 그에 따르면 정월대보름은 큰 명절이고, 마을의 잔치였다.

충효마을은 환벽당과 취가정, 광주호호수생태원도 품고 있다. 환벽당은 증암천 건너의 식영정, 소쇄원과 '1동3승'의 명승으로 불린다. 환벽당은 나주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가 후진을 양성한 곳이다. 송강 정철과의 인연도 여기에서 맺어졌다. 김윤제는 소년 정철을 10년 동안 가르치고, 자신의 외손녀와 혼인까지 시켰다. 정철은 <성산별곡>을 통해 이 일대 풍경을 노래했다. 정철을 시인이자 정치가로 성장시킨 곳이 충효마을이었다. 취가정은 김덕령이 석주 권필의 꿈에 나타나 '취시가'를 주고받은 데서 유래한다.

호수생태원은 광주댐 주변의 생태와 어우러지는 친수공간이다. 자연관찰원과 습지, 데크 탐방로 등으로 이뤄져 있다. 황지해 작가의 '해우소 정원'과 말무덤도 눈길을 끈다. 해우소 정원은 몸을 비우고 마음을 비워 스스로 자유롭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꿈을 담고 있다. 말무덤은 김덕령의 말을 묻었다는 설과, 나쁜 말(언어)를 다 묻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경사진 데가 없어 남녀노소 누구라도 불편하지 않게 거닐 수 있는 것도 호수생태원의 장점이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