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지역의 ‘틀림’ 아닌 ‘다름’이 지역학의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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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지역의 ‘틀림’ 아닌 ‘다름’이 지역학의 시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지역학 시발은 내셔널리즘·글로벌리즘을 극복하거나 타개하는 논의다.
그래서 서울의 하위 개념으로 쓰이는 ‘지방’ 호명을 거부한다
지역이기주의와 지역 우월주의.
바야흐로 분권자치의 시대의 지역학은 이를
  • 입력 : 2023. 01.08(일) 17:17
  • 편집에디터
지역학의 요체는 무엇일까

그때부터,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걸 부인하는 것은 식민지 조국 조선을 배반하는 것이었고, 더럽고 냄새나는 조국 중국을 배반하는 것이었고, 희망 없는 조국 베트남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백인-앵글로색슨-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기회와 풍요의 나라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내가 뱀과 같은 유태인이라는 것을, 내가 무식하고 가난한 히스패닉이라는 것을, 내가 거리에서 부랑아로 자라난 이탈리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었다.(고종석, ?전라도 생각?, ??서얼단상??, 개마고원, 2002) 지역에 대한 주체성의 인식이랄까. 이것은 일종의 깨달음일 수 있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과 그 위에 서 있는 주체 곧 나를 확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고종석이 남도 사람인 것처럼 또 누군가는 경상도 사람, 충청도 사람, 강원도 사람, 제주도 사람, 경기도 사람으로 그 위치와 존재를 깨닫고 그 실상을 연구하는 것이 지역학의 시발일 것이다. 지역의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말하는 것이요, 서울에 대응되는 부속으로서의 지방이 아니라, 호혜 평등한 지역대 지역에 대한 권위를 말하는 것이며 오히려 특장에 따라 각양의 지역이 중심되는 그런 구조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강창(講唱)의 형식에 토대를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충청도식 중고제가 유명무실해지고 전라도 어투의 동편제에서 서편제로 이행하는 판소리 미학이 구축된 이유가 있다. 전라도 음색이 가지는 미학이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음악의 언어에서 미적 헤게모니를 포섭한 이유라고나 할까. 그것이 무엇일 것인가를 분석하고 해독하는 것이 지역학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판소리와 산조를 공부하거나 그 내력을 추적하려면 어느 지역을 중심 삼고 실천해가야 할까? 단연코 남도다. 전주로 가고 광주로 가고 순천과 목포로 가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판소리와 산조를 공부하기 위해 서울 소재의 대학으로 가고, 서울의 어떤 기관이나 단체에서 활동해야 격조를 인정받는 행로는 전근대적인 것이다. 이를 수정하는 것이 지역학의 할 일이다.



향토학에서 주체학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향토학자, 향토사가 등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연구자들에 의해 수집 정리된 것이 이른바 ‘향토학’이다. 전성곤의 ?야나기타가 전개한 ‘지방’과 ‘향토’ 이미지와 그 경계?(일본사상, 제24호. 2013)에 의하면 “<중앙=도시>라는 시각에서 보아 <지방=농촌>이라는 중앙중심주의 패러다임에 지배당하는” 것이 ‘향토’의 개념이었다. 여기서의 향토는 “지방 개념과 별 차이 없이 농촌, 시골, 주변으로 간주 되면서 <고향>이라는 심리적 ‘공간적인 지역성’을 가진 개념으로 ‘발견’되었다.” 야나기타는 이후 미나가타와 논쟁하면서 ‘향토’라는 개념으로 일본 전체의 지역 개념을 재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지방과 향토라는 존엄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국 민속학과 제국주의의 토대로 기능했던 야나기타의 향토 개념은 한국의 식민통치 정책으로 수립되기에 이른다. 송화섭 교수는 그래서 향토라는 용어보다 향촌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역학은 기왕의 향토학적 토대를 승계하기는 했지만, 자기 지역을 연구한다는 순수한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에는 로컬과 글로벌, 지역(region), 이들을 포섭하는 클로컬 등의 개념이 중첩되어 있다. 하병주의 ?지역학의 정체성과 패러다임 모색?(지중해지역연구, 9-1, 2007)에 의하면 지역학의 논의를 ??열하일기?? 등 여행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예컨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옌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지역학은 새로운 지역을 말하는 것이나 세계지역학 등으로 호명되는 그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일종의 내셔널리즘이나 글로벌리즘을 극복하거나 타개하는 방향의 논의들을 지역학의 시발로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서울의 하위 개념으로 쓰이는 지방이라는 호명을 거부한다. 지역학이란 호명 이전에 향토학, 로컬 등의 개념이 선행되었다. 로컬은 또 글로벌 개념과 대응하거나 중첩되면서 글로컬 논의로 확대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이 개념들이 학제적 총의라고나 할까. 어떤 합의에 이른 것 같지는 않다. 지금도 논의나 논란이 진행 중이라는 뜻일 것이다. 대개 지역학의 부상을 1980년대 초로 본다.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이후로 보는 것 같다. 지방자치제도의 부활과 분권 자치에 대한 제도적 변화, 지역 주체에 대한 사회적 의제들이 부상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1987년을 기점으로 한국사회의 정치변동과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래 생성된 ‘팔칠년체제’와의 상관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87년 이전은 향토학의 시대로, 87년 이후는 지역학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향토학과 지역학의 접근이나 태도가 다르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 경계해야 할 것은, 지역이기주의와 지역 우월주의다. 바야흐로 분권자치의 시대, 문화분권 시대의 지역학은 이를 극복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남도인문학팁

정맥(靜脈)사회와 정맥도시



좌계 김영래 선생이 지난달 ‘낙동강의 오래된 미래, 조문국’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정월 초사흗날 (사)연안보존네트워크 주관으로 좌계선생과 내가 대담하는 형식을 빌어 논의하면서 이 발표내용을 알게 되었다. 연안보존네트워크 대담은 차차 풀어내기로 하고, 우선 그가 제안한 정맥사회를 여기 소개해두기로 한다. 그가 말한 정맥사회가 내가 말하는 지역학과 순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정맥사회의 개념을 패스트푸드와 슬로푸드의 관계로 풀어낸다. 급속한 교통에 도시가 길들여지면 기존의 공동체는 해체되며 된장찌개와 같은 음식과 마을의 신화, 풍속 등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정맥사회다. 오늘날 전 세계의 도시는 동맥(動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동맥사회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인체에서 세포 하나하나를 신진대사를 통해서 여과시키는 것은 정맥이다. 이 정맥이 세포에 대한 여과를 서서히 하기에 슬로우라는 개념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그가 제안한 정맥사회 3가지 실천 모토는 슬로우(slow), 심플(simple), 스몰(small)이다. 국제슬로시티 연맹에 가입된 30여개국 280개의 도시가 이런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좌계는 낙동강의 수운을 끄집어내기 위해 이 제안을 하였기 때문에, 물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다. 이 또한 불에서 물로, 강한 것에서 약한 것으로 이행하는 시대정신에 비추어볼 때 지역학의 아젠다 창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느리고 천천히,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게, 지나치게 크거나 위압적이지 않고 작고 명료하게, 이같은 모토는 대도시 중심으로 재편되는 동맥사회의 폐단을 극복하고 광범위하게 연결된 네트워크 중심의 정맥사회를 재구성하는데 매우 긴요한 것들이다. 나는 그래서 부울경에 대응하는 광주, 전남, 바다의 세 꼭지를 연결하는 광전해(光全海) 관계도시를 주장했고, 지역학의 창발을 꾸준하게 강조해왔다. 검은 토끼의 해, 아마도 우리 사회에 예정된 많은 변화 중, 정맥도시 혹은 정맥사회와 지역학도 중요한 화두로 부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을이 살아야 지역이 살고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