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박관서> 남악신도시의 형성과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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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향기·박관서> 남악신도시의 형성과 미래
박관서 시인·무안학연구소장
  • 입력 : 2023. 03.28(화) 17:22
박관서 시인
깜짝 놀랐다. 현재 진행 중인 무안군사(務安郡史)에 포함될 남악신도시 르포를 쓰는 중이었다. 원래 남악신도시가 개발되기 이전에 무안군 삼향읍 남악리 앞에는 대죽도와 소죽도라는 섬이 있었다. 죽도(竹島)라는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대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면서 동시에 이와 관련된 많은 역사적 사실과 이야기들이 있다.

특히, 전라남도 도청이 들어서게 된 공간 선택의 논리와 주요 여론의 하나가 오룡산과 대죽도 사이의 오룡쟁주(五龍爭珠) 형국에 관한 것이었다. 앞으로 영산강을 향하고 뒤에서 남악리를 품고 있는 오룡산(225m)은 노령산맥의 끝자락에 솟은 명산이다. 예전에는 주룡산(駐龍山)이라고도 불린 오룡산은 산자락에 용(龍)자가 붙은 상룡, 회룡, 오룡, 용포, 용계마을까지 다섯 개의 마을을 품고 있다. 서울의 북악에서 흘러온 기맥이 무안의 주산인 국사봉을 거쳐 오룡산의 남악에 이르러 다시 양쪽에 승달산과 유달산 그리고 앞으로는 월출산을 거느리고 눈앞의 여의주(대죽도)를 물고 돌아서면(회룡리) 하늘로 승천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악신도시 곳곳을 답사하다가 현재는 중앙공원이 되어 있는 대죽도를 유심히 관찰하던 중 오삼석(吳三錫, 1670-1734)이 대나무 화살을 만들었다는 안내판 문구를 보았다. 그래서 관련 문헌을 찾아 남악리의 대표 성씨인 해주오씨 후손을 만나 남악리의 깊은 역사와 그 현장을 찾아보게 되었다. 해주오씨의 재각인 용강재(龍崗齋)와 문중 묘역이었다. 이는 오룡산 북쪽 끝 나지막한 산자락에 있었는데 남악리 초입인 안동마을 언덕에 있었다.

여기에서는 역사로서의 남악리와 정신으로서의 남악신도시 형성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먼저 남악리에서 유일하게 문중재각이 현전하고 있는 해주오씨의 입향조인 호조판서를 지낸 오숙기(吳淑奇, 1548-1604)와 관련된 설화와 역사적 흔적이었다. 약 400여 년 전인 임진왜란 이후 영광에서 무안 남악리로 장가를 온 오숙기가 달성배씨 부인의 기지로 달성배씨가 묻힐 묘역에 부친 오윤의 묘지를 옮겨서 가문의 발복과 함께 남악리에 무사히 안착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용강재와 그 옆의 해주오씨 선산 묘역을 살펴보는데, ‘효암달성배공휘정윤지묘(孝庵達城裵公諱正潤之墓)’ 곧 달성배씨인 배정윤은 물론 그 옆에 또 다른 달성배씨 세천(裵世天)의 묘와 묘비가 있었다. 단지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해주오씨의 묘역에 달성배씨의 묘역이 현재까지 섞여 있었고, 이를 다시 문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원래 무안군 삼향면은 향소부곡이 있던 곳으로 임성부곡, 극포부곡, 군산부곡이 있어서 삼향(三鄕)이라고 불렀다. 삼향에서는 특산물인 신우대를 이용한 대나무 화살촉을 만드는 부곡마을이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삼향전죽(三鄕箭竹)”을 궁궐의 후원에 심기 위해 전라도 관찰사에게 50포기씩 캐어 보내도록 하고,궁중에서 각종 행사 때 상품으로 하사되고, 가장 굳세고 강하여 온 나라에서 쓰는 화살대가 모두 삼향에서 나온다고 했던 데서 확인할 수 있다. 1487년에 전라도관찰사였던 김종직이 읊은 「금성곡」 12수 가운데 7수에서 ‘삼향의 대화살이 천하에 소문났으니, 주석돌과 단은이 진기할 것 있으랴’라는 내용으로도 거듭 확인된다.

그리하여 오숙기의 증손자인 오삼석은 대죽도와 소죽도를 매입하여 당시 임진왜란 등으로 혼란한 나라의 국방강화를 위하여 대나무화살을 만들어 나주목에 상납하였다. 이에 나라에서 상을 하사하려고 하였으나 “대화살은 국가를 방비하는데 필요한 물산이어서 헌납한 것인데, 어찌 보상을 바라겠는가!”라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새롭게 형성되어 발전하고 있는 남악신도시의 형성에 있어서 서로 다른 성씨와 입장과 삶의 형태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 모여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일은 어쩌면, 물과 육지가 그리고 갯벌과 해조음이 어우러져 이뤄진 간석지(干潟地)였던 ‘물안골 곧 무안’의 문화지리적 정체성이었다. 물론 이러한 융합의 정신에서 남악신도시를 비롯한 무안의 미래를 찾아볼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