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심명자> 우방국이라는 이름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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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칼럼
문화향기·심명자> 우방국이라는 이름값
심명자 대한독서문화예술협회 이사장
  • 입력 : 2023. 05.02(화) 14:59
심명자 이사장
최근 주어가 없는 말의 진위를 두고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대통령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 발언에서 ‘백 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으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라는 발언 때문이다. 여당 수석대변인은 주어가 생략된 이 말의 주체는 ‘일본’이라고 하면서 오역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대통령이 일본의 대변인이냐고 반박하는 야당을 반일감정을 자극한다고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과거사를 두고 이렇게 발언하는 대통령도 문제이지만, 진위여부를 따져보지도 않고 상대를 부정하는 것도 심각하다. 자신의 테두리인 경계선 밖은 무조건 틀렸다고 인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최근에 출판된 그림책 ‘경계선’(글·그림 장서윤, 달그림출판사, 2023)은 많은 상징을 담고 있다. 어렸을 때 같이 성장한 친한 친구이지만 이 구역과 저 구역으로 사는 곳이 나뉘고, 기혼과 미혼으로 나뉘며 여러 경계선이 만들어진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누군가는 제일 싫어할 수도 있고, 자신이 아끼는 물건이 누군가에게는 가치 없을 수도 있다. 우리 몸을 특정하게 구분할 수 없고, 생각을 옳고 그르다고 규정할 수도 없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일상에서 상대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못한다.

한 나라를 이끄는 통치자의 선택과 결정은 그 나라의 명운을 바꾼다. 우방국이라는 이유로 절대 강국의 요구 조건을 따르면서 한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말이 우방국이지 실제는 자국의 이익을 가장 우선으로 한다. 조선시대 말에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나눠 갖기로 한 것과 영일동맹으로 영국은 인도를, 일본은 조선을 정복하는 것에 서로 묵인하기로 한 것은 국가 이기주의의 표상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또 어떠한가? 19세기 초에 유럽을 모두 손에 넣을 기세였던 프랑스를 상대로 한 7년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제독에게 패하고,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켜려고 대륙봉쇄령을 내린다. 러시아가 이를 어기고 영국과 무역을 재개하자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한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러시아 군대는 후퇴를 거듭했지만, 실제로는 ‘초토화 작전’을 구사했다. 나폴레옹의 속전속결 전법으로 파죽지세의 승기를 잡은 이유 중의 하나는 군인들의 식량 보급을 정복지역의 현지 조달 방법으로 선택한 것도 있다. 이것은 나폴레옹에게 최대의 약점이 돼서 결국 패망으로 이른다.

세계 최대 강자였던 영국은 이후에도 곳곳에서 프랑스와 때로는 적국으로, 때로는 협력국으로 땅따먹기를 강행한다.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은 자국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경계를 만들고 분열을 시켜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영국의 행위는 강대국의 국가이기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유조 탱크로 불리는 중동지역의 땅따먹기를 위해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를 부추겨 전쟁에 가담시키고, 재정확보를 위해 유대인들과 이중 거래를 한다. 국가도 영토도 없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땅을 매입하고 조금씩 넓혀나갔다. 마침내 양국간의 영토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난처해진 영국은 UN의 결정으로 떠넘기고 두 나라의 분쟁에서 손을 뗀다.

약한 나라의 염원을 외면하는 강대국의 민낯은 미국도 뒤지지 않는다. 1946년, 맥아더 포고 ‘극동군사법원헌장’을 기초한 2차대전의 전범국 재판에서 식민정복을 당한 대한민국에 대한 보상은 제외됐다. 일본이 조선 및 중국 등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승리국인 미국을 비롯한 UN 국가의 보상과 전범자 처벌을 위한 재판을 실행했다. 재판부는 2차대전의 원흉이자 전범의 수뇌인 천황 히로히토에 대하여 그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단지 신이 아닌 인간 천황이라고 발표함으로써 면죄부를 주었다. 일본을 대표한 천황 대신 군부와 일부 정치인 A급 전범자 27명 중 고작 9명을 사형집행 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사면된 전범자들 역시 재판과정을 통해 모두 책임을 부담하였고, 더 이상 일본은 가해국으로서의 책임이 없다는 것으로 종결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군부와 정치인들은 다시 정계로 등장해 일본의 현대사를 장악하고 권력을 유지했다. 미국은 악명높은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저지른 사람마저도 은밀히 사면 시켜 주었다. 유아, 임산부, 청년 노인 등 일명 ‘마루타’를 수북이 쌓아놓고 페스트균과 콜레라균 등을 주입하거나 인체 장기를 해부하는 등 온갖 만행을 일삼은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들이 실험해서 확보한 의학기술을 미국의 의학발전에 사용하기 위해 데려갔으며 평생 의료활동을 할 수 있는 길도 보장해주었다.

일본과 미국의 연이은 순방길에 오른 대통령의 선택은 초강국의 미국과 이웃 나라 일본이다. 이 선택이 위험천만한 길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우리는 일본이 저지른 과거사를 발목 잡고 싸우자는 것이 아니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행보를 외면하자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세계의 정세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들로 하여금 적개심을 갖게 해서 위기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경제와 안보가 안정적으로 가기 위해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배워봄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