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박재항> 기념일의 조건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테마칼럼
이타적 유전자·박재항> 기념일의 조건
박재항 한림대학교 글로벌학부 겸임교수
  • 입력 : 2023. 05.03(수) 13:58
‘2018 스타워즈 데이‘를 맞아 스타워즈 팬들이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코스프레 행사를 열고 있다. 뉴시스
 절을 하는 할아버지의 발목이 휙 꺾였다. 다행히 할아버지께서는 바로 자세를 추스르시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례를 주재하셨다. 3월 대학 입학을 앞둔 해의 신년 차례 때였다. 오랜 기간 공무원 생활을 하신 할아버지께서는 정부 시책에 적극 호응하셔서 양력 1월1일에 설날 차례를 지내셨다. 두 달에 한 번 꼴로 제사를 지내고, 설과 추석 차례도 열심히 지내는 1980년대까지로는 별 특별할 것도 없는 가정이었다. 제사 시간을 11시 자시(子時)까지는 아니더라도 10시는 넘겨 지내는 게 어린 시절부터 좀 불편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발목이 꺾인 그해의 차례가 끝나 음복을 하고 세배를 받으시기 직전에 중대발표를 하셨다. 모든 제사를 통합하여 5월4일 밤에 지내고, 5월5일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놀러 가라고 하셨다. 큰 며느리였던 어머니로부터 집안 여성들에게는 8·15 해방에 버금가는 선언이었다. 그해 5월4일에 첫 번째 통합 제사를 지내고, 다음 날에는 집안의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가 이어졌다. 9월 추석 차례까지 주관하신 후 10월에 할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뜨셨다. 이후 5월4일 연례 제사를 지낸 후에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해에 통합 선언을 하시지 않았으면, 이후에 후손들은 제사를 철저히 지내셨던 고인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서 감히 그리 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들이 오갔다.
 시간이 흐르며 집안에 어린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어린이날이라는 휴일 하나를 전날의 제사로 반쯤 뺏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계 노동절인 5월1일이 근로자의 날이 되어 직장인들은 쉬는 날이 되고, 토요 휴무제가 들어서고 연월차 휴가를 연중에 쓸 수 있게도 되면서 5월4일 통합 제사가 긴 연휴의 중간에 끼는 경우가 생겼다. 여행을 가려고 했다가 제사 때문에 못 가는 이들이 나왔고, 통합 제사에 대한 볼멘소리가 들렸다. 그보다 더한 건 5월이 ‘가정의 달’과 관련한 너무 많은 기념일이 몰려 있어, 행사 자체에 대한 피로감이 나타났다. 4일의 제사에 이어 특별하게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15일 스승의 날에, 21일 부부의 날과 25일의 성년의 날이 연달아 있었다.
 위의 날들 이외에도 행정안전부 홈페이지에서 기념일로 홈페이지에 표시한 날들이 5월에 세 개 더 있다.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 18일의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더하여 31일의 바다의 날이 올라 있다. 연관 단체 중심으로 기념하는 유권자의 날, 발명의 날, 방재의 날도 5월에 있다. 특별한 단체는 없지만 특정 작물과 관련 상품의 소비 진작을 위해 최초 누가 시작했는지 기원 자체도 불분명한 날들이 있다. 5월2일의 오이 데이(Day)와 14일 로즈(Rose) 데이이다. 오이 데이는 숫자 3이 겹친다고 하여 3월3일이 삼겹살 데이로 된 것과 비슷한 연유이다. 로즈 데이는 장미가 많이 피는 시기이기도 하고, 2월14일 발레타인 데이부터 매달 14일을 기념하는 선상에서 나왔다.
 5월의 많은 기념일들을 기업이나 브랜드가 활용하는 사례를 두고 얘기를 하다 보니, 한 친구가 5월4일도 특별한 날이라고 했다. 1919년 한국의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 일어난 외국 제국주의에 반대한 5·4운동 기념일을 떠올렸다. 대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기념 심포지엄을 준비할 정도로 중국사를 전공한 우리들에게는 뜻깊은 날이었지만, 질문을 한 영화광 친구는 그 대답은 픽 웃어 넘기고는 영화 스타워즈(Star Wars)의 날이라고 했다. 그 영화의 가장 유명한 대사인 ‘우주의 힘이 그대와 함께 하길(May the force be with you)’에서 ‘May the force’의 영어 발음이 5월4일을 말하는 ‘May the 4th’와 같다는 데 착안하여 이렇게 정해졌다고 한다. 이 날은 스타워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등장 인물들의 복장을 하고 모이는 코스프레 행사를 하고, 스타워즈 영화를 몰아서 보든지, 같은 테마로 나온 게임을 하고, 자신들의 수집품들을 교환하고 파는 시장을 열기도 한다.
 발음이 아니라 표기하니 비슷한 모양이라 만들어진 날도 있다. 지난 3월10일 주택가 동네에서나 어울릴 법한 배관수리공의 노란색 밴(van) 차량이 고급 쇼핑가로 유명한 미국 뉴욕시 맨해튼의 5번가와 48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양쪽에서 도열하여 박수를 치거나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가운데 게임으로 유명한 일본 기업 닌텐도의 전시장을 겸하는 플래그숍 앞에 섰다. 보물상자를 꺼내듯 차에서 박스를 꺼내서 건물 홀 중심에 마련된 전시대에 고이 올려져 자태를 드러낸 건 공사장 인부들이 신을 법한 작업화였다. 닌텐도의 대표 게임 캐릭터이자 올해 전세계 최고 흥행 영화로 등극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주인공인 슈퍼 마리오가 영화 속에서 신고 나온 작업화를 실물로 만든 것이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붐을 조성하기 위한 사전 마케팅 행사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3월10일이었을까. 마리오 알파벳 ‘MARIO’의 ‘I’와 ‘O’가 숫자 ‘1’과 ‘0’과 비슷하니 ‘MAR10’이라 쓰고, 3월의 ‘MARCH’를 줄여서 ‘MAR’라고도 하니 자연스럽게 3월10일이 마리오의 날이 되었다. 스타워즈 데이와 비슷하게 슈퍼 마리오의 팬들이 코스프레를 하고, 모여서 게임을 즐기고 마리오의 생일 파티를 열었다. 닌텐도에서는 뒤늦게 2015년부터 기업 차원에서 후원을 하고, 작업화 실물 공개 전시처럼 기념하는 것과 같은 특별 행사를 펼치고 있다.
 한국에서 특정 상품의 기념일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례로는 11월11일의 빼빼로 데이가 첫손에 꼽힌다. 한국 남부 지방의 중고생들이 다이어트에 성공하자는 염원을 담아 숫자 ‘1’자 같은 체형을 만들자며 11월11일에 빼빼로를 주고받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빼빼로 연매출의 절반 정도가 11월11일 전후 2주 동안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꼭 빼빼로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막대 모양의 과자를 주고 받는다. 젊은 연인들이 주대상인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와 달리 전세대를 아우른 기념일이다. 해외의 교과서에 한국의 기념일로 실리고, 빼빼로 수출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스타워즈, 마리오, 빼빼로 기념일들의 공통점이 있다. 영화사, 게임 회사, 과자 회사에서 주도하지 않고 팬들이 먼저 기념일 날짜를 잡고 축하하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빼빼로데이의 성공에 스스로 자신들의 날을 제정했던 몇몇 과자 상품들의 기념일 활용 마케팅 시도는 모두 처참하게 실패했다. 억지로 만든 기념일과 행사는 진정한 참여를 이끌지 못한다. 뭔가 기념일을 만든다면 함께 기념할 이들에게 제공하는 바가 확실해야 한다. 아니, 거기서 출발을 해야 한다.
 필자의 할아버지께서 발의하신 제사 통합과 그 날짜는 수고하는 가족들과 어린 아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왔기에 환영을 받았다. 또 하나 교훈을 새긴다면 5월초 연휴가 대세가 되며 통합 제사가 걸림돌처럼 인식되었듯이, 아무리 훌륭한 조치라도 시대 흐름과 맞춰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